김삿갓 방랑기197화

2021. 2. 27. 10:58김삿갓 방랑기


★ 시인 김삿갓 방랑기 197화

[男兒何處 不相逢(남아하처 불상봉 : 살다 보면 어디선가 다시 만나는 운명)]

어느덧 진주에 도착한 김삿갓은 우선 촉석루(矗石樓)부터 찾아갔다.

진주성 남쪽 벼랑 위에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촉석루는 그 아래로 남강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강 건너편 우거진 대나무 숲은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대나무 숲이 끝나는 강가에는 하얀 모래밭이 길게 연결되어 있어 자연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살아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은 왜적과 우리 관군이 피아간에 운명을 걸고 싸운 가장 치열했던 격전장이었다.
왜적이 총력을 기울여 공격해 왔었지만 전라 병사 황진(黃進)과 경상 병사 최경회(崔慶會),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등이 전력을 기울여 방어해오다가 마침내 세 장사가 모두 장렬히 전사한 곳이 이곳 촉석루이다.
이처럼 촉석루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인지라 다락 위에는 시인 묵객들의 현판시가 수없이 걸려 있었다. 김삿갓은 다락 위에 걸려 있는 시들을 모조리 읽어 내려오다 인조 때의 명신이었던 홍만조(洪萬朝)의 시를 소리 내어 읊었다.

奇巖千尺 起高樓(기암천척 기고루)
下有長江 咽不流(하유장강 열불류)
今日經過 征戰地(금일경과 정전지)
暮雲殘雪 入邊愁(모운잔설 입변수)

(해설)
천 척 높은 벼랑 위엔 다락이 솟아 있고,
벼랑 아래 긴 강에선 여울이 흐느낀다.
오늘 지난날 싸움터를 지나가노니,
저무는 구름 쌓인 눈 변방의 시름이네.

촉석루 위에서 강을 굽어보니 어느덧 가을이 깊어 공중에는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저 멀리 성벽 밑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은 아마도 어느 촌가에서 저녁을 짓는 연기이리라.

‘오늘도 어느새 하루해가 또 저물어 가는구나. 오늘 밤은 누구의 집에서 신세를 져야 하는고?’
김삿갓은 예전에는 아무리 날이 저물어도 잠자리를 걱정해 본 일이 없었다. 어느 집에서나 찬밥 한술 얻어먹고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자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해소병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찬 방에서 자게 되면 기침이 심하게 날 뿐만 아니라, 전신에 이상한 동통이 발동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김삿갓에게 따뜻한 방을 제공해 줄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아무려나 어디선가 밥을 얻어먹어야 하겠기에 다락에서 막 일어서려는데, 별안간 누군가가 앞을 막고 나서며,

“아니 이거, 삿갓 선생 아니오? 남아하처 불상봉(男兒何處 不相逢)이라더니 삿갓 선생을 이런 데서 다시 만날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하고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김삿갓도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이거, 노형은 우국지사가 아니오? 우리가 평양 연광정에서 만나고 나서 이거 몇 년 만이오?”
우국지사도 김삿갓의 손을 움켜잡으며 감격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연광정에서 만난 것은 벌써 10여 년 전 일이오. 그런데 오늘날 이번에는 진주 촉석루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세상에 이런 기우(奇遇)가 어디 있단 말이오!”
10여 년 만의 해후상봉이고 보니 모두가 놀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김삿갓이 ‘우국지사’라고 부른 사람은 ‘이북천(李北天)’이라는 본명을 가진 풍객(風客)이었다.
평양 연광정에서 김삿갓이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땅을 두드리며 다음과 같이 비분강개한 일이 있었다.

“우리가 임진년에 왜놈들한테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은 그 당시의 벼슬아치들이 동인이니, 서인이니 당쟁에만 정신이 팔려 나라를 걱정할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소.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전국 각지로 돌아다니며 임진왜란 당시의 유적지를 샅샅이 돌아보고 나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대정치가가 될 생각이오.”
그때 이북천의 우국지정이 너무도 출중하였기에 김삿갓은 농담 삼아,

“오늘부터 노형을 ‘우국지사’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겠소.”
하고 말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과거를 가진 두 사람이 10여 년이 지나서 진주 촉석루에서 다시 만났으니 피차가 기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도 많이 늙었지만 우국지사도 백발이 성성해진 걸 보니 그동안 많이 늙으셨구려.”
“인정사정없이 밀어닥치는 세월이야 난들 어찌 막아낼 수가 있겠소이까.”
그러고 나서 우국지사는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한지,

“우리 어디 가서 술을 나누며, 쌓였던 회포를 마음껏 풀어 보기로 합시다.”
하고 김삿갓을 술집으로 잡아끄는 것이었다.
김삿갓도 술을 마다할 턱이 없었다.

남강물이 바로 눈앞에 굽어보이는 촉석루 담벼락 밑에 ‘유천(流川)’이라는 주막이 하나 있었다.
김삿갓은 우국지사와 함께 주막으로 들어서다가 간판을 보고 주모를 나무라주었다.

“이 사람아! 전쟁터에서 군사가 많이 죽은 것을 ‘유혈성천(流血成川)’이라고 한다네. 여기는 임진왜란 때 왜놈들을 많이 죽인 곳이니까, 이왕이면 주막 이름을 ‘유혈성천’이라고 할 일이지, 왜 단순히 ‘유천’이라고 했는가?”
그러자 주모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잖아도 주막 이름을 ‘유혈성천’이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비참하다고 해서 ‘유천’이라고 했다오.”
김삿갓은 술이 거나해져 오자, 문득 옛날 일이 떠올라 우국지사에게 물었다.

“참, 노형은 그 옛날 임진왜란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나는 언젠가는 파사현정의 정치가가 되겠노라’ 호언했던 일이 있지 않소? 만약 그때의 장담이 그대로 실현되었다면 지금쯤은 정치가가 되었어야 옳은 일인데, 도대체 그 꿈은 어떻게 되셨소?”
우국지사는 뜻밖의 질문에 씁쓸하게 웃었다.

“허허허, 그것은 젊은 날의 객기에 지나지 않았던 호언장담이었지요.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시운(時運)’이란 것이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단 말입니다.”
“차라리 잘 되었소이다. 옛글에 ‘영웅은 만인의 적(英雄萬人之敵)’이라는 말이 있습디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면서 그까짓 영웅은 되어서 무엇 하오?”
“삿갓 선생은 워낙 달관하신 양반이니까 영웅을 우습게 여기시겠지만, 나 같은 속물에게 영웅이란 그야말로 대단하게 보이는 인물이라오. 그러나 영웅이 되려면 반드시 시운이 따라야 하는 거예요.”
우국지사는 그렇게 탄식하며 술을 한 잔 쭈욱 들이켜고 나더니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즉흥시 한 편을 읊어 보이는 것이었다.

志士逢時少(지사봉시소)
佳人薄命多(가인박명다)
生平無所事(생평무소사)
頭白奈何何(두백내하하)

(해설)
지사가 때를 만나기 어려움은
미인이 박명하는 것과 같도다.
내 평생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머리가 백발이 되었으니 이를 어찌 하리오.

김삿갓은 그 시를 들어 보고, 우국지사는 아직도 속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구나 싶어 적이 슬픈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미련을 떨쳐 주기 위해 얼른 이렇게 말했다.

“소동파의 시에,
生前富貴 草頭露(생전부귀 초두로 : 살아 있을 때의 부귀는 풀잎의 이슬이요),
身後風流 陌上花(신후풍류 맥상화 : 죽은 뒤에도 풍류는 밭두렁의 꽃과 같다)라는 말이 있소. 노형이나 나나 우리가 이미 백발이 다 되었는데, 이제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무엇을 바랄 것이오. 그저 남은 나날을 모든 것의 시시비비를 떠나서 살면 되겠지요.”
우국지사는 김삿갓의 말에서 새삼 느낀 점이 있었던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삿갓 선생 말씀이 진실로 옳은 말씀이시오.”
김삿갓은 술을 마셔 가며, 우국지사에게 물었다.

“내일 아침이면 서로 헤어져야 할 판인데, 노형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시오?”
“여기서 남해(南海) 섬들이 멀지 않으니 그쪽을 한 번 돌아볼까 합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국지사도 나와 마찬가지로 종신 운수객(雲水客)이 분명하구려... 우리가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나 또 만나게 되려는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글쎄올시다. 사람의 일을 누가 알겠소이까? 운수가 좋으면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시 만날 기회가 또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삿갓 선생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시오?”
하고, 이번에는 우국지사가 김삿갓에게 물었다.
김삿갓은 잠시 생각하는 빛을 보이다가,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이번 겨울만은 따뜻한 지방에서 편히 쉬고 싶지만 그럴 만한 곳이 있어야 말이지요.”
우국지사는 그 말을 듣고 나더니 눈을 커다랗게 떠 보였다.

“그렇다면 마침 잘 됐소이다. 강진 고을에 안복경(安福卿)이란 진사 친구가 있소. 내가 그 친구에게 편지를 써드릴 테니 이번 겨울은 그 친구 집에서 편히 쉬도록 하시오.”
“고맙소이다. 그렇게 폐를 끼쳐도 괜찮을 사람인지요?”
“그 점은 염려 마시오. 그 친구는 돈도 많지만 풍류를 이해하기 때문에 삿갓 선생이 찾아가시기만 하면 소홀히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삿갓은 몸이 하도 괴로운지라 우국지사의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나저나 내일 아침이면 우국지사와 작별할 것을 생각하니 김삿갓은 우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국지사에게 술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번에 헤어지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노형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삿갓 선생은 무슨 말씀을 하시오? 설사 내일 죽는 한이 있어도 사람은 모름지기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조용히 말했다.

“날이 밝으면 우리들은 어차피 헤어져야 할 것이오. 우리가 두 번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지 모르니 내가 이별의 시를 한 수 읊기로 하겠소.”

憂國悲歌士(우국비가사)
相逢矗石樓(상봉촉석루)
寒烟凝短堞(한연응단첩)
落葉下長洲(낙엽하장주)

素志違其卷(소지위기권)
同心已白頭(동심이백두)
明朝南海去(명조남해거)
江月五更秋(강월오경추)

(해설)
비분강개 잘하는 우국지사와
촉석루 다락에서 다시 만났는데,
차가운 안개는 성벽담장에 맺혀있고,
가랑잎은 모래밭에 뒹굴고 있소.

우리들은 본래의 뜻은 서로 틀려도
마음은 하나건만 이미 백발이 되었소.
그대 내일 아침 남해로 떠나가면,
강산에는 어느덧 가을이 깊어 오리요.

영원한 이별을 상징하는 구슬픈 시였다.
우국지사도 그 시를 듣고 나자, 가슴이 메어 오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당나라의 시인 고적(高適)이 친구를 멀리 보내며 읊었다는 시를 서글픈 목소리로 읊어대었다.

十里黃雲 白日曛(십리황운 백일훈)
北風吹雁 雪紛紛(북풍취안 설분분)
莫愁前路 無知己(막수전로 무지기)
天下誰人 不識君(천하수인 불식군)

(해설)
누런 구름 길게 뻗어 하루해가 저무는데,
북풍에 기러기 날고 눈발이 사납구나.
가는 곳에 친구 없다 걱정하지 마오,
천하의 그대를 어느 누가 모르리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뜻하는 말인지 모른다.
한 번 만난 사람은 생별(生別)이든 사별(死別)이든 간에 반드시 헤어지게 마련이다.
김삿갓은 오늘날까지 무수한 이별 속에서 살아왔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우국지사와의 이별처럼 절실한 비애를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 19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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