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 복이 와요
--- 사랑방 야화 중에서 ---
고수#
2025. 8. 16. 11:28
열여덟살 백면서생 이운봉이
단봇짐 하나 달랑 메고
문경새재를 넘고 탄금대를 지나
주막집에서 겨우 새우잠을 자며
걸어걸어 한양에 다다라 당주동
구석진 주막에 문간방 하나를 잡았다.
과거가 한달이나 남았지만 한양 공기도 쐬고
과거 흐름도 잡을 겸 일찍 올라온 것인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한 달 동안
먹고 잘 일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였다.
자신이 행랑아범 노릇을 하겠다며
좁은 문간방 값을 깎고 또 깎아
다른 방의 반값에 눌어 붙었다.
밤늦게 외출했던 손님이 돌아올 때면
얼른 나가 대문을 열어 주기도 하고
아침엔 일찍 일어나 마당도 쓸었다.
밥 때가 되면 주막 밥은 비싸서 못 사 먹고
밖에 나가 선술집 국밥을 사 먹기도 하지만
때 거르기를 밥 먹듯이 했다.
산적처럼 생겨 먹은 주막주인은
운봉이를 제 집 하인 다루듯
함부로 심부름을 시키고
툭하면 욕을 퍼부어 댔다.
하지만 안주인은 달랐다.
바깥주인 몰래 누룽지도 갖다 주고
삶은 감자도 갖다 주며 인정을 베풀어
어떤 땐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밤
안주인은 닭죽에 호리병 가득
탁배기까지 챙긴 소반을 들고
운봉의 방에 들어왔다.
바깥 주인한테 들킬세라
운봉이가 눈을 크게 뜨자
눈치 빠른 안주인은
“걱정하지 마.
그 화상은 노름판에 갔으니
내일 들어올지 모레 들어올지 몰라”
그렇잖아도 배가 고프던 참에
운봉이 닭죽을 비우고 나자
안주인이 탁배기 따라 주었다.
탁배기도 단숨에 들이켜고 나자
안주인이“나도 한잔 따라 주게.”
술을 따라주자 술잔을 비우고
한숨을 쉬더니 신세타령을 늘어 놓았다.
주막에서 모은 푼돈이 좀 쌓였다 하면
이 화상은 노름판에 몽땅 처박아 버리고
화가 난다고 몇날 며칠 술독에 빠져 살고….
아이고 아이고, 내 팔자야.”
어느덧 호리병 탁배기가 바닥나자
안주인은 부엌에서 또 한병을 들고 왔다.
마당을 가로 지르며 장대비를 맞아
홑적삼이 몸에 짝 달라붙어
40대 초반의 육덕이 그대로 나타났다.
나좀 살려주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 들었다
소나기 한줄기가 뿌리고 자나가자
옷매무새를 고치며 안주인이
“운봉이는 이번에 알성급제하고
나중에 감사에 오를걸세"
징표라도 한자 써 주시게
운봉은 웃으며 지필묵을 꺼내 글을 써 줬다.
안주인은 그걸 들고 호호호 한바탕 웃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평양 감영에 웬 노파가 찾아와
이모라며 감사를 만나겠다고 떼를 썼다.
“나는 이모가 없는데…” 하며 노파를 만났더니
바로 그 옛날 당주동 주막의 안주인이 아닌가!
“그날 밤에 써 주었던 종이를
기름 먹여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감사 어른.”
그때 장난으로 써 준 종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감사가 되면 천냥으로 이 은혜를 갚으리다."
감사 덕택에 평양 구경까지 잘하고
보름 만에 한양 집으로 돌아온 그녀가
천냥 보따리를 풀자 중풍에 누워 있던
남편이 눈이 휘둥그레져 사연을 물었다.
이제 반신불수가 된 영감이 겁나지 않아
그때 그날 밤 일을 자세히 얘기해 줬다.
그러자 영감이 버럭 화를 내며 하는 말이
“야! 이 바보 천치 같은 여편네야!
기왕 주는 거 한 번더 줬으면
이천 냥은 받았을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