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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無處缺(거 무 처 결)

고수# 2025. 6. 11. 07:07

菜     根     譚

제 63장 : 居無處缺(거무처결) : 그릇이 비어 있어야 넘치지 않는다.

 

敧器   以滿腹   撲滿   以空全   故君子寧居無   不居有   寧處缺   不處完

기기   이만복   박만   이공전   고군자녕거무   불거유   영처결   불처완

 

기기(敧器)는 가득 차면 엎질러지고, 박만(撲滿)은 비어 있을 때 온전하다.

군자가 무(無)에 머물지언정 유(有)에 살지 않고,

이지러진 곳에 처할지언정 완전한 곳에 처하지 않는 이유다.

 

기기(敧器)는 유좌(宥坐)의 기(器)라고도 한다.

속이비면 기울어지고, 물을 반쯤 담으면 똑바로 바로 서고, 가득 담으면 넘어져 쏟아지는 그릇이다.

옛날 군자 옆에 두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마음을 다잡는 기구로 삼았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따르면 하루는 공자가 주공의 사당인 주묘(周廟)를 둘러보다가 ‘기기’를 보게 되었다.

공자가 사당지기에게 물었다.

“이것은 어떤 기계요?”

사당지기가 대답했다.

“이는 유좌지기(宥坐之器)하고 합니다.”

유좌(宥坐)는 앉은 자리의 오른쪽을 말한다.

유(有)는 우(右)와 통한다.

공자가 말했다.

“내가 듣건대 ‘유좌지기’는 차면 엎어지고, 비면 기울고, 중간이면 바로 선다고 했소. 그게 사실이오?”

“바로 그렇습니다.”

공자가 자로를 시켜 물을 부어 시험케 했다.

과연 차면 엎어지고, 중간이면 바로 서고, 비면 기울었다.

공자가 위연(喟然)히 탄식했다.

“아, 어찌 가득 차고도 엎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는가!”

 

박만(撲滿)은 옛날의 벙어리 저금통을 말한다.

나무나 흙으로 만든다.

위에 좁은 구멍 하나만 있어 그리로 돈을 넣어 모아 두었다가 꽉 차면 깨뜨린다.

속이 가득 차지 않을 때라야 안전하다.

여기서는 기기와 박만 두 가지 물건의 이치를 들어 군자가 중정(中正)을 취해야 하는 이유를 설파하고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쓸모있는 그릇이 되려면 물건을 담아도 넘어지거나 깨지지 않아야 한다.

넘어지지 않는 자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꿋꿋이 가는 자를 말하고,

깨지지 않는 자는 매사에 늘 겸허한 자세로 임하는 자를 말한다.

자신을 부단히 단련하며 절제하는 수기(修己)와 극기(克己)가 필요한 이유다.

그게 ‘주역’이 역설하는 중정의 길이다.

‘중용’은 중정을 중용(中庸)으로 표현해 놓았다.

같은 말이다.

 

오대십국(五代十國) 말기 후주의 여여경(呂余慶)은 조광윤의 참모로 있었다.

총명하고 유능한 인재로 정사에 능했던 꺼닭에 조광윤은 출정 때마다 국사를 여여경에게 맡겼다.

송나라를 세운 후 조보(趙普)와 이처운(李處耘)등이 재상에 차례로 임명됐다.

여여경을 비롯한 여타 참모는 오랫동안 요직에 중용되지 못한 채,

차관급인 호부시랑과 병부시랑 및 지방 장관을 전전했다.

그러나 여여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주(四州) 관원으로 있을 때 막강한 위세를 떨치던 왕전빈(王全斌)의 부하가 대취해 난동을 부리자

곧바로 법에 따라 사형에 처했다.

얼마 후 조보와 이처운 등이 모함을 받아 조정에서 쫓겨날 때 아무도 감히 나서지 않았으나

여여경이 앞장서 이들을 변호하고 나섰다.

그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하며 지조를 버리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흡족하지 않지만 더 많이 갖으려 애쓰지 않고,

부족한 점을 채워 완벽하려고 애쓰지 않은 덕분이다.

그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군자 중의 군자로 칭송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