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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意失意(득의실의)

고수# 2025. 6. 1. 07:08

※  이번 글은 분량이 매우 많습니다.

인내를 가지시고 일독 바랍니다. ※


菜      根      譚
제 58장 : 得意失意(득의실의) :

득의 할 때 실의 할 일이 생긴다.


苦心中   常得悅心之趣   得意時   便生失意之悲
고심중   상득열심지취   득의시   변생실의지비


마음이 괴로울 때는 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정취를 찾아야 한다.
득의(得意) 했을 때 문득 실의(失意)의 슬픔이 생긴다.


열심지취(悅心之趣)는 마음을

기쁘게 하는 취미를 말한다.
실의지비(失意之悲)는 뜻이나 의욕을 잃는

실의에 빠졌을 때의 비통함을 뜻한다.
득의 했을 때의 기쁨인 득의지환(得意之歡)과 대비된다.
득의 했을 때와 실의 했을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한마디로 요약돼 있다.
실의 했을 때는 ‘열심지취’로 마음을

달래며 후일을 기약하고,
득의 했을 때는 ‘실의지비’를 생각해 언행을 더욱

신중히 하며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열심지취’는 괴로움이 다하면 즐거움이

오는 고진감래(苦盡甘來),
‘득의지환’은 기쁨이 다하면 슬픔이 오는 흥진비래

(興盡悲來)와 취지를 같이한다.
무슨 일이든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할 것도 없고,

정반대로 의도한 바대로 잘 풀린다고 기고만장할 것도
없다는 얘기다.
동진(東晉) 때 활약한 도연명(陶淵明)의 전원시(田園詩)는

흥빈비래와 고진감래의 취지를 가장 잘 반영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317년 중원이 흉노에 점령되고 서진(西晉)이 멸망하자,

낭야왕(琅琊王) 사마예(司馬睿)가 왕돈(王敦)과
왕도(王導)등의 옹립으로 지금의 남경인 건업(建業)에서

보위에 올랐다. 이것이 동진이다.
동진은 5년 뒤에 빚어진 왕돈의 반란을 계기로

100여 년 동안 내외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327년 소즌(蘇峻)의 반란, 365년 양주자사(楊州刺史)

사마훈(司馬勛)의 반란,
372년 전(前) 호군장군(護軍將軍)

유희(庾希)의 반란 등이 그렇다.
383년에는 북방을 통일한 전진의

부견(符堅)이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동진의 장수

사현(謝玄)이 기적적으로 부견의 군사를 격파했다.
사가들은 이를 비수대전(淝水大戰)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동진의 수명을 약간 연장시킨 것에 불과했다.
지방의 군벌의 반란과 농민 봉기가 계속 일어난 탓이다.
397년 연주자사 왕공(王恭과) 예주자사 유해(庾楷)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고,
399년 손은(孫恩)이 주도하는 농민 봉기가 일어나

10여 년 동안이나 지속됐다.
이 와중에 402년 환현(桓玄)이 반란을 일으켜 건업을

함락시키고 이듬해에 보위에 올랐다.
국호는 초(楚)였다.
404년 검무장군 유유(劉裕)가 환현을 토벌하고 폐위된

안제 사마덕종(司馬德宗)을 복위 시켰다.
418년 유유가 안제를 유폐하고 공제 사마덕문(司馬德文)을

즉위시켰다가 2년 뒤인 420년에 마침내
자신이 보위에 올랐다. 국호는 송(宋)이었다.


도연명은 동진 흥녕 3년(365년)에 지금의 강서성 구강인

삼양의 시상(柴桑)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장강의 중류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파양호(鄱陽湖),

북쪽으로는 여산(廬山)을 바라보고 있어
풍광이 뛰어났다. 그러나 당시는 천하가 크게 어지러웠다.
그가 태어난 해에 양주자사 사마훈이 반기를 든게 그렇다.
원래 그의 증조부는 동진 초기 대공을 세우고 8개 주의

군사를 총괄한 명장 도간(陶侃)이다.
매일 벽돌 1백 장씩 나르며 단련했다고 한다.
그의 외조부는 일대의 풍류 인물이었던 맹가(孟嘉)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부친 때에 이루러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도연명 때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글 읽기를 즐겨 했다.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구하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증조부 도간을 매우 존경한

그는 증조부처럼 큰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29세 때 겨우 다른 사람의 천거를 받아

참군(參軍) 같은 작은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관직에 13년 동안 있었다. 그의 눈에는 온통

벼슬아치들의 아첨과 탐욕만 보였다.
결국 그는 젊었을 때 품었던 포부와 열정을

모두 잃고 이내 낙향했다.
그가 낙향하게 된 데에는 나름 사연이 있었다.
그가 지금의 강서성 호구현인 평택현(平澤縣) 

현령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관청의 공전(公田)에 술을 빚는 데 쓸 찰벼를 심게 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 만류했다.
“술만 먹고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먹고 살려면

메벼를 심는 게 낫습니다.”
결국 공전 2백 무(畝 약 200평) 가운데 150무는 찰벼,

나머지 50무는 메벼를 심기로 했다.
두 달여 뒤 군에서 지방 감찰관인 독우(督郵)가 조사

차 내려온다는 통보가 왔다.
현청의 아전이 귀띔했다. “독우를 허술하게 대했다가는

큰 야단을 맞습니다.
옷을 단정히 입고 공손한 태도로 맞이해야 합니다.” 화가

난 도연명은 탄식했다.
“내가 쌀 다섯 되 밖에 안 되는 녹봉 때문에 어찌 시골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관복을 훌훌 벗어 던지고 관인을 내맡긴

뒤 관아를 총총히 떠났다.
집으로 돌아온 뒤 농사를 지었다.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했지만 달리 먹고 살길이 없었던

까닭에 생계를 잇기 위해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새벽 일찍 밭에 나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지속했다.
그는 농민들과 가까이 지내며 관원과 귀족을 멸시했다.
그의 시(詩) 가운데 농사를 소재로 한 시가 많은 이유다.

후대인은 그를 전원시(田園詩)의 효시로 부른다.


몇 년 뒤 동진의 명장 단도제(檀道濟)가

강주(江州) 자사로 부임해 왔다.
직접 도연명의 집을 찾아와 다시 벼슬길에 나설 것을

권했으나 도연명이 듣지 않았다.
단도제는 수시로 좋은 술과 음식을 보냈으나

도연명은 이 또한 거절했다.
당시 강주 일대에는 도연명 이외에도 유유민(劉遺民)과

주속지(周續之)가 은거생활을 했다.
세인들은 이를 통틀어 심양삼은(瀋陽三隱)으로 불렀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은 도연명과 달랐다.
그들은 부유했으며 관리들과 교제도 잦았다.
게다가 속셈이 있었다. 은거생활을 통해서

명성을 날리고자 한 것이다.
도연명만이 진정한 은거생활을 했다.
그가 도중에 ‘은거’의 뜻을 지닌 도잠(陶潛)으로

개명한 이유다.
그는 남조 송나라 3대 황제인 문제(文帝)유의륭(劉義隆)의

치세인 원가4년(427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천하가 온통 소란한 가운데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한

혼란기 속에서 일생을 산 셈이다.
그는 현실정치에 몸을 담는 것을 포기하고 전원의 삶을 택했다.
그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자

하는 심경을 절절히 읊은 이유다.
‘귀거래사’는 결코 소극적 도피를 칭송한 게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 선택을 설명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를 은일시인(隱逸詩人)으로 부르는 것은

절반만 맞다. 전원시인이 보다 정확하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작품은 시126수, 사부

(辭賦 서정적,서사적인 운문)3편, 산문10편 정도다.
새로운 시적 세계를 창출해 낸 그의 전원시는 후대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타 시인들과 달리 수사에 힘을 쏟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하는데 주력한 덕분이다.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을 담고 있는 그의 시는 소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 게 특징이다.


그간 등장하기 이전만 해도

이른바 현언시(玄言詩)가 유행했다.
‘현언시’는 심오한 철학적 이치를 탐구하는

현학(玄學)에 입각한 시를 말한다.
(玄學 : 노자와 장자 일파의 학설 / 이론이 깊고

어려워 깨닫기 힘든 학문 (예:주역)
도연명의 시에도 현학적 이치를 다룬 것이 여러

편 있으나 일상생활 속에서 생각하고 느낀바를 토대로 한 까
닭에 ‘현언시’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는 현실의 고난과 번민을 잊기 위해서 술에

기대기도 하고, 공을 세워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려 들기도 하고,
자연에 몸을 맡긴 채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에게 술은 근심 해소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그보다 오히려 암담한 현실에서 빠져나와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역할을 했다고 평하는 게 옳다.
그 유명한 음주(飮酒) 20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제 5수가 이를 웅변한다.


結廬在人境 (결려재인경)  마을 안에 엮어놓은 오두막집
而無車馬喧 (이무거마훤)  수레 말의 시끄러운 소리 들리지 않네
問君何能爾 (문군하능이)  묻노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心遠地自偏 (심원지자편)  마음이 초연하니 사는 곳 절로 외지지
採菊東籬下 (채국동리하)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따다
悠然見南山 (유연견남산)  허리를 펴니 멀리 남산이 보인다
山氣日夕佳 (산기일석가)  산 모습은 저녁에 더 아름다워
飛鳥相與還 (비조상여환)  새들도 함께 둥지로 돌아 가네
此間有眞意 (차간유진의)  여기에 진실한 뭔가 담겨 있는가
欲辨已忘言 (욕변이망언)  따져 말하려다 이미 말을 잊었네



농촌 마을의 오두막집에 살면서 수레와 말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 찾아와 다시 관직에 복귀할 것을 권해도 전혀

그럴 뜻이 없음을 표명한 것이다.
속세의 명리에 무관심한 까닭에 사는 곳이 어디든

그곳은 외진 곳이라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는 어떻게 살고자 했을까?
여느 농부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어나 밭으로 나가

일하다가 해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했다.
‘국화를 따다’ 표현은 경작지가 넉넉하지 못해 울타리

밑에도 밭을 일구어 작물을 재배했음을 보여준다.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국화를 따느라 허리를 굽히고

계속 일을 한 까닭에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온다.
잠시 쉬려고 허리를 펴자 멀리 남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 주변을 돌아보니 석양에 새들이

짝을 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정겹다.
문득 농부의 삶이 자연의 섭리임을 깨닫는다.
그게 마지막 구절인 ‘따져 말하려다 이미 말을 잊다.

’ 표현으로 나타났다.
이는 ‘장자’ 외물(外物)의 일화를 차용한 것이다.


통발은 그 목적이 물고기에 있으므로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고
올무는 그 목적이 토끼에 있으므로 토끼를 잡고 나면 올무를 잊고
말(言)은 그 목적이 뜻에 있으므로 뜻을 얻도 나면 말을 잊는다.
이 시는 제목만 ‘음주’이지 술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왜 제목을 ‘음주’라고 한 것일까?
전국시대 후기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이름을 빌려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어부사(漁父辭)’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당시 조정에서 쫓겨난 뒤 초췌한 몰골로 강가를 헤매고 있는

굴원에게 어부가 물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소?”
굴원이 오연(傲然)한 어투로 대답했다.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기에 그렇소!”
여기의 취(醉)는 비정성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후한의 허신(許愼)이 쓴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취‘를

예의에 어그러짐이 없이 자신의 주량의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풀이해 놓았다.
음주를 향음주례(鄕飮酒禮)로 간주한 역사를 반영한다.

이후 난세가 거듭 이어지면서 사대부들은 음주를
암담한 현실과 개인적인 번민으로부터 빠져나가는

수단으로 간주했다.
죽림칠현의 일원인 유영(劉伶)이 주덕송(酒德頌)에서

술을 극찬한 게 그렇다.
이 시의 제목이 ’음주‘인 연유가 여기에 있다.
관직을 내던지고 농사짓는 이유가 바로 유영의 ’주덕송‘

취지와 같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의 전원시는 전원생활 속에서 자신이 느낀 점과

깨달은 점을 절묘한 서정적 시어로 표현해 놓은 점에서
가히 독보적이다.
그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전혀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그가 그린 이상세계는 전쟁과 권력투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물질적인 풍요는 없지만 누구나 한데 어울려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소박하고 균등한 삶이 그것이다.
사계절의 시령(時令)을 쫓아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곡식을 수확해도 세금을 바칠 필요조차 없는 이상세계다.
이는 바란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국가나 외부의

힘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도화원기(桃花源記)에 그 취지가 잘 나타나 있다.
도연명은 여기서 어부를 통해 이상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어부는 고기를 잡으려고 배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도화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유자기(劉子驥)는 이상세계를 꿈꾸던 와중에 도화원

소문을 듣고는 찾아 나서려 했지만 
죽음 앞에서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어부 또한 현실 세계로 돌아온 후 태수에게 도화원 존재를

알리고 다시 그곳을 찾아가려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도화원기‘에 등장하는 이상세계는 어부가 우연히 가게 되었을

때처럼 일하며 본분을다할 때
문득 자기도 모르게 가 있게 되는 곳을 말한다.


이는 난세를 사는 지식인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며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도화원기‘의 이상세계는 생명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중국 문학사에서 문인이 전원생활을 시에 담아

표현한 것은 도연명이 처음이다.
화려한 언어와 수식을 중시하는 당시의 풍조에서 벗어나

간결하고 구어(舊語)에 가까운 언어를 구사하고,
비교적 산문(散文)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하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전고(典故)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덕분이다.
이는 일반적인 흐름과 배치된 까닭에 그의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최초의 문학이론서에 해당하는 유협(劉勰) 문심조룡

(文心雕龍)에 그에 관한 언급이 없고,
시에 관한 평론집인 종영(鐘嶸)의 시품(詩品)에서 그의

시를 상품이 아닌 중품에 배치한 게 그 증거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당나라 때에 이르러 진가를 인정받게 됐다.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그를 숭앙하며 ’자연파‘를 자처했다.
이백(李白),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 등도 자연파를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하나같이
그의 전원시를 애호했다.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는 그에 대한 평판이 더욱 높아졌다.
소식(蘇軾)의 평이 이를 뒷받침한다.
“나는 시인들 중에 좋아하는 이가 없고 오직

도연명의 시를 좋아한다.
조식(曺植), 유정(劉楨), 포조(鮑照), 사령운(謝靈運),

이백, 두보 등의 여러 뛰어난 시인이 있지만 모두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소식이 도연명을 그리며 화도시(和陶詩)

109수를 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朱子)조차 도연명의

인격과 시를 높이 평가했다.
이후 금, 원, 명, 청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원시는

모든 시인의 학습 대상이 되었다.
명대(明代)의 하맹춘(何孟春)은 이같이 평했다.
“중국 역사상 오직 도연명만이 최고의 인격을

갖추었고 최상의 시문을 남겼다.“


북경대 교수를 지낸 문학평론가 주광첸(朱光潛)은

중국시사(中國詩史)에서 도연명과 견줄 만한 역대 시인으로
굴원과 두보를 꼽으면서 이 두 사람도 도연명의 진순미

(眞醇美)를 제대로 쫓지 못했다고 평했다.
도연명의 전원시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가 한국 최초로 ’귀거래사‘

화답하는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를 짓고,
만년에 도연명을 흠모해 자신의 거처를 ’와도헌(臥陶軒)‘으로

명명한 게 그렇다.
이색(李穡)은 도연명을 두고 ’천고의 고상한 선비‘로 극찬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그를 숭상하는 열기는 전혀 식지 않았다.
김시습은 소식과 마찬가지로 ’화도시‘ 66수를 남겼고,

이퇴계 역시 ’음주‘ 20수에 화답하는 시를 남겼다.
특이하게도 사림파(士林派)의 우두머리 김종직은

도연명의 술주(述酒)에 빗대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사실이 드러나는 바람에

연산군 때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다.
도연명의 전원시가 수천 년에 걸쳐 동아시아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꾸준히 읽힌 이유는 무엇일까?
난세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고뇌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바를
결코 포기하지 않은 ’인간승리‘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음주‘ 제 5수의 ’따져 말하려다 이미 말을 잊다‘의

마지막 구절을 접하면서 때를 만나지 못한 선비들은
무릎을 치면서 탄복했을 것이다.
그의 전원시는 난세가 만들어낸 걸작 중의 걸작에 해당한다.


사림파 : 사림(士林)은 전원의 산림(山林)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문인. 학자로서
15세기 이후 조선 중기 중앙정계를 주도한 정치 집단이다.
고려 말기의 유학자 야은 길재(吉再)가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쓴 결과 영남 일대는
그의 제자가 많이 배출되어 조선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훈구파에 대립하여 사림파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사림은 유림이라 불리기도 한다

온건파 사대부를 계승했다.
영수로는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등이다.
후계는 동인(東人)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