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
기생(妓生) 소백주(小柏舟) - 34회
고수#
2025. 4. 24. 08:00
기생(妓生) 소백주(小柏舟) - 34회
제34회 술동이
그러나 아무도 아직까지 저 사내처럼 내다 주는
간장 종지 같은 술잔을 타박하며 시비를 거는 사내는 없었다.
그저 주면 주는 대로 받아 마시고는 마치 천하의
달필이라도 되는 양 시 한 편을 제멋에 휘갈겨
쓰고는 소백주의 처사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필경 저 사내는 시문(詩文)에도 내 처사에도 안중에 없구나!’
문지방 너머로 대청에 앉아있는 사내의 꼴을
살펴본 소백주는 술을 동이 째 가져오라고 소리친다는
집안에서 일하는 아낙의 말을 듣고는
그가 원하는 대로 동이 째 술을 내다 주라고 했다.
아낙이 술동이를 가져다 주자 그 사내가
술동이를 받아 들더니 그것을 안아 들고는
단숨에 벌컥벌컥 그 술을 다 마셔버리는 것이었다.
소백주는 제 눈을 의심하며 등불 아래 앉아있는
사내를 흠칫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과연 저 사내가 어떤 글을 써 올릴 것인가?
소백주가 짐짓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사내는 바로 다름 아닌 김 선비였던 것이다.
하루 종일 쫄쫄 굶고 수원에 당도한 김 선비는
한 끼 끼니를 때울 요량도 하룻밤 잠잘 곳도 없었는데,
소백주의 방을 보고는 한달음에 달려오다 자괴감으로
길 가운데 우뚝 멈춰 서서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허기나 면하고
가자고 마음을 정하고는 달려와서 많이 좀 먹어
보자고 마구 소리쳤던 것이다.
김 선비의 마음속에는 시를 써서 소백주의 마음에
들거나 말거나 그러한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내놓으라는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지위를 가진
문장가들도 다 제 마음 내키는 대로 낙방을 놓는다는데,
어찌 김 선비의 시가 소백주의 마음에 들 것인가!
김 선비는 오직 배고픔이나 면하고 잠시
쉬어가자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쫄쫄 굶은 빈 뱃속으로 동이째로 벌컥벌컥
술이 들어가고 맛난 편육 한 접시를 안주로 후다닥 쓸어
먹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글을 배워 천하의 바른 도를 세우기는커녕 가정도
건사하지 못하고, 한 몸 바로 세우지도 못했으니 이는
사내로서 글을 배웠다고 할 것이 없었다.
뭇 사내들은 글을 배워 과거에 급제해 임금 앞에
나아가 지위와 권력을 하사받고, 가정을 일으키고,
문중을 일으키고, 나라의 동량이 되어 한 몸 반듯하게
세워 빛나는 이름을 창공에 높이 띄워 화려한 금의를
두르고 출세하여 호의호식 온갖 영화를 누리며,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김 선비 자신은 있는
재산마저 다 뇌물로 바쳐 탕진하고 말았으니
어디 고개를 둘 곳이 없었다.
하루 종일 걸어 노곤한 몸에 술기가 올라와 잠시
생각에 젖어있던 김 선비는 하얀 종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붓끝에 새까만 먹물을 잔뜩 묻혀 겨누었다.
“급기야는 내 한 끼 허기를 채우기 위하여 한갓
기생 따위의 마음에나 드는 글을 써야 하다니!.......
추하도다! 추하도다!”
김 선비는 내키지 않은지 순간 쩝 입맛을 다시며
붓을 쥔 손가락을 가늘게 떨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35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