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難於有禮(난어유래)

고수# 2025. 4. 16. 06:44

菜     根     譚

제 36장 : 難於有禮(난어유래) : 군자를 대할 때 예를 갖추기가 어렵다.

 

待小人 不難於嚴 而難於不惡 待君子 不難於恭 而難於有禮

대소인 불난어엄 이난어불오 대군자 불난어공 이난어유례

 

(소인을 대할 때 엄정히 대하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미워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

군자를 대할 때 공손히 대하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올바른 예를 갖추는 것이 어렵다.)

 

대소인(待小人)의 대(待)는 맞이한다는 뜻으로 원래 마주 대한다는 뜻의 대(對)와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서로 유사한 의미로 사용됐다.

이 대목은 소인과 군자를 대할 때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인은 도움을 줄 대상이면 붙고 쫓고, 그렇지 못하면 쉽게 떠난다.

이에 반해 군자는 공자가 말했듯이 이익을 보고도 의로움을 찾는 부류이다.

군자를 대할 때 반드시 예를 갖춰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형식적인 예와 달리 실질적인 예를 갖추는 일이 쉽지 않다.

정답은 성심에 있다.

마음을 다하여 대군자(待君子)를 하면 형식적인 예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 진심을 주고받는 

진정한 교우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인구(人口)에 회자하는 법언(法諺) 가운데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라’는 말이 있다.

소인배의 소행은 괘씸하지만 사람 자체까지 미워하지는 말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게 쉽지 않다. 아무리 군자를 자처할지라도 호오(好惡)의 감정을 지녔기 때문이다.

소인배는 꽁하기 때문에 쉽게 원한을 품고 쉽게 풀리지 않는다.

심지어 복수의 칼을 가는 경우도 있다. 앙갚음을 하려는 것이다.

의정 단상에서 멱살을 잡아가며 싸우는 정상배들의 모습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걸핏하면

“법대로 하자‘고 악을 쓰는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다.

사람들이 점점 왜소해지고, 법이 더욱 험악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소인배는 한번 원한을 맺으면 미워하기만 할 뿐 이를 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군자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군자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곧바로 들어내지 않는다.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군자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 군자보다 소인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있다.

평소 소인배를 포함해 사람을 널리 포용하는 마음을 기르는 이유다.

 

군자는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전혀 없는 게 아니다.

소인배를 대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이들을 제대로 대하는 일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군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공손한 태도보다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다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예를 갖추는 것이 어렵다‘고 지적한 이유다.  지나치게 공손하면 아첨이 된다.

그게 바로 과공비례(過恭非禮)이다. 이는 맹자 이루 하(離婁 下)에 나오는 대목에서 나온 것이다.

예가 아닌 예인 비례지례(非禮之禮)와 의가 아닌 의인 비의지의(非義之義)를 대인은 하지 않는다.

맹자는 부정의 부정을 통한 어법으로 예와 의를 역설하고 있다.  일종의 강조 어법이다.

”비례지례와 비의지의 모두 진정한 예의를 흉내 낸 사이비 예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주희(朱子)는 풀이하기를

“이치를 살피면서 정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례지례와 비의지의가 구별되는 것이다.

대인은 일에 따라 이치를 쫓고, 때에 따라 마땅히 처리하니 어찌 그리할 리 있겠는가?” 라고 했다.

주희의 풀이에도 불구하고 비례지례와 비의지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히 파악 하기가 쉽지 않다.

과공비례는 구체적으로 사이비 예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주희의 사상적 스승인 북송대(北宋代)의 정이천은 이같이 풀이한 바 있다.

“공손한 것은 본래 禮지만 지나치게 공손한 과공(過恭) 같은 것은 비례지례에 해당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들이 예의를 지키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여타 뭇짐승과 구분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종종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할 짓을 하는 사람을 인면수심(人面獸心)으로 비판한다.

모습만 사람일 뿐 그 마음은 짐승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조선조 선조 때의 명사 송강(松江) 정철(鄭澈)은 ’훈민가‘에서 이같이 읊은 바 있다.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 하자스라.

사람이 되어나서 옳지 못하면

마소를 갓 고깔 씌어 밥 먹이나 다르랴!”

문제는 방법이다. 똑 같은 예의일지라도 지나치면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히려 비굴하게 보이거나 미덥지 못하게 여겨지기 십상이다. ’과공비례’는 이를 지적한 것이다.

의도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까지 강조하게 되어 예의 기본정신을 훼손하게 된다.

정이천이 말한 과강비의(過剛非義)가 이것이다.

 

한때 버스 기사 가운데 인사도 잘하고 친절하게 하는 분이 있다고 하여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유사한 사례가 매우 많다. 두 번 다시 똑같은 택시를 탈 확률이 적은 경우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매일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경우다.

타고 내릴 때마다 똑같은 멘트를 듣게 되면 은근히 짜증이 날 수 있다.

타고 가는 내내 똑같은 소리를 계속 반복적으로 듣는 것은 고역이다.

하차할 정거장을 친절히 알려주는 녹음장치를 틀어 놓는 게 차라리 낫다.

말보다 간단히 눈인사 정도만 하는 게 효과적이다. ‘과공비례’로 느껴질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복잡한 거리에서 어깨를 스쳐도, 혼잡한 지하철 내에서 발을 밟아도 아무 말이 없다.

미안하다는 뜻의 ‘스미마셍’을 입에 달고 사는 일본인의 눈에 한국인은 거의 예의 없이 무뚝뚝해 보이거나

때로는 무례하게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역사문화의 차이 때문이다.

한국인의 기준에서 보면 일본인의 모습이 오히려 ‘과공비례’로 비춰진다.

 

건강 등 모든 면에 ‘과공비례’의 이치가 그대로 적용된다.

좋은 음식도 지나치게 먹으면 오히려 탈이 난다.

과다한 음식섭취로 인한 비만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유형의 국민스포츠가 각광을 받는 이유다.

나름 일리가 있으나 이 또한 지나치면 독이 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혹사에 가까운 과도한 운동으로 오히려 건강을 해치고 있다.

건강의 유지는 음식섭취와 운동의 적절한 조화에서만 가능하다.

노동과 휴식, 직무와 여가, 유흥과 금욕 등 모든 사안이 이런 이치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선에서 절제할 필요가 있다.

모두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정신, 즉 중용(中庸)이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