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
2025. 2. 16. 07:44
★ 수호지(水湖誌) - 232
수호지 제103회-1
사내는 상투를 튼 맨머리에 두건도 쓰지 않았고, 올이 가는 짧은 베옷 적삼을 입고 세모꼴의 부들부채를 들고 있었다.
얼굴을 쳐들고 뒷짐을 진 채 팔자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는 어제 저자거리에서 유배 가는 자가 창봉 쓰는 자를 이겼다는 것을 듣고, 공단 형제가 그에게 무술을 배울까 봐 훼방 놓으려는 것이었다.
사내가 왕경을 꾸짖었다.
“너는 죄수로서 어찌하여 도중에 길을 벗어나 여기서 남의 집 자제를 속이고 있는 것이냐?”
왕경은 그가 공씨 친척인 줄 알고 감히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동촌의 황달이었다.
아침에 선선할 때 공가촌 서쪽 끝에 사는 유대랑에게 노름빚을 받으려고 가는 길이었는데, 공단의 장원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는 평소에 공단 형제를 우습게 여겼기 때문에 멋대로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공단은 황달을 보자 가슴 속에서 불길이 3천 길이나 치솟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욕을 퍼부었다.
“당나귀가 싸지른 씨팔놈아! 지난번에는 내 노름밑천을 뺏어먹더니 오늘은 또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사람을 업신여기는 거냐!”
황달도 크게 노하여 욕을 했다.
“니 어미와 붙어먹을 놈아!”
황달은 부채를 내던지고 앞으로 달려들어 주먹으로 공단의 얼굴을 쳤다.
왕경은 두 사람이 욕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황달임을 눈치 채고, 다가가서 말리는 척하다가 목에 쓴 칼로 황달의 배를 후려쳤다.
황달은 배를 얻어맞고 두 다리가 허공으로 뜨면서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공단과 공정 그리고 두 장객이 일제히 달려들어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기 시작했다.
황달은 등·가슴·어깨·옆구리·배·얼굴·머리·팔다리 할 것 없이 주먹으로 맞고 발에 채여 성한 곳이라곤 단지 혀밖에 없었다.
네 사람이 달려들어 셀 수도 없이 두드려 패 옷이 갈가리 찢어졌다.
황달은 그래도 입으로 소리쳤다.
“잘 친다! 잘 쳐!”
황달은 옷이 다 찢겨 나가 알몸뚱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꼴이 되었다.
압송관 손림과 하길이 몇 번이나 뜯어말려 공단 등은 겨우 손을 멈추었다.
황달은 반 죽도록 얻어맞아 땅바닥에 널브러져 숨만 헐떡이며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공단은 장객 서너 명을 불러 황달을 동쪽으로 가는 길옆의 풀밭에 내던지게 하였다.
황달은 뙤약볕 아래에서 반나절이나 뻗어 있었다.
황달의 이웃 사람이 풀을 베러 나왔다가 우연히 황달을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황달은 침상에 누운 채 다른 사람을 시켜 고소장을 써서 신안현에 제출하게 하였다.
한편, 공단 등은 이른 아침부터 한 바탕 소란을 피운 다음 장객을 불러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여 왕경과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왕경이 말했다.
“그놈이 반드시 원수를 갚으려고 소란을 일으킬 겁니다.”
공단이 말했다.
“그 씨팔놈은 집안에 마누라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변의 이웃들도 그놈의 완력에 억눌려 왔는데, 오늘 그 씨팔놈이 죽도록 얻어맞은 것을 보면 그놈을 위해 힘을 써 주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놈이 뒈지면 장객을 하나 내보내 그놈의 목숨 값을 대신하게 하면, 소송을 한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만약 뒈지지 않으면, 단지 상호 치고받은 소송이 될 뿐입니다.
오늘 사부님 덕분에 원수를 갚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술이나 드시면서 마음 놓고 계십시오. 그리고 저희 형제에게 창봉술을 가르쳐 주시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공단은 다섯 냥짜리 은덩어리 두 개를 꺼내 두 공인에게 건네면서 며칠만 봐달라고 요청했다.
손림과 하길은 돈을 받고 허락했다.
그날부터 열흘 정도 머물면서, 왕경은 창봉술을 공단 형제에게 전수하였다.
공인들이 재촉하고, 또 황달이 현청에 고소했다는 소식도 들려와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단은 섬주에 가서 쓰라고 백은 50냥을 왕경에게 주었다.
밤중에 일어나 행낭을 수습하여 날이 밝기 전에 장원을 떠났다.
공단은 아우에게 은자를 주면서 왕경을 호송하라고 하였다.
네 사람은 며칠 후 섬주에 당도하였다.
손림과 하길은 왕경을 데리고 관아로 가서 개봉부의 공문을 바쳤다.
부윤은 공문을 보고 왕경을 인수받은 다음 회서를 써서 두 공인에게 주었다.
부윤은 왕경을 뇌성으로 보냈고, 공인들은 회서를 가지고 돌아갔다.
공정은 아는 사람을 찾아 왕경 대신 관영과 차발을 비롯하여 아래위로 뇌물을 먹였다.
뇌성의 관영은 장세개란 자였는데, 공정에게 뇌물을 먹어 왕경의 칼을 벗겨 주고 살위봉도 때리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보내지도 않고 혼자 방을 쓸 수 있게 해주어 왕경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어느덧 두 달이 흘러 가을이 되었다.
어느 날 왕경이 방안에 한가롭게 앉아 있는데, 한 군졸이 와서 말했다.
“관영상공께서 부르시네.”
왕경이 군졸을 따라가 대청 아래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관영 장세개가 말했다.
“네가 여기 온 지 한참 되었는데, 아직 너에게 일을 시킨 적이 없구나. 내가 진주에서 나오는 좋은 각궁(角弓)을 하나 사고 싶다.
진주는 동경 관할에 있고, 너는 동경 사람이니 필시 각궁의 값이나 진위(眞僞)를 잘 알 것 같구나.”
관영은 소매 속에서 종이 꾸러미 하나를 꺼내 왕경에게 주면서 말했다.
“은자 2냥이다. 각궁을 하나 사 오너라.”
왕경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왕경은 은자를 받아 방으로 돌아왔다.
종이 꾸러미를 펼쳐 보니 과연 눈처럼 하얀 은덩어리였다.
무게를 달아 보니, 서너 푼이 더 나갔다.
왕경은 본영을 나가서 북쪽 거리에 있는 활과 화살을 파는 점포로 가서 1냥 7전을 주고 진짜 진주 각궁을 하나 샀다.
돌아와 보니 장관영은 자리에 없었다.
왕경은 활을 집안 하인에게 건네주고, 3전의 은자는 자신이 챙겼다.
다음날 장세개는 왕경을 불러 말했다.
“네가 일을 잘하는구나. 어제 사온 각궁은 아주 좋았다.”
왕경이 말했다.
“상공께서는 각궁을 불에 말리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알았다.”
그때부터 장세개는 매일 왕경에게 음식물을 사오는 일을 시켰다.
그런데 전날처럼 은자를 주지 않고, 장부를 하나 주면서 왕경이 매일 사온 물건들을 장부에 기록하게 하였다.
하지만 상인들이 왕경에게 외상을 줄 리가 없었다.
왕경은 할 수 없이 자기 돈으로 물건을 사서 관아에 들였다.
장세개는 물건이 좋으니 나쁘니 하면서 때리지 않으면 욕을 했다.
열흘이 지나자 왕경은 장부를 내밀고 그동안에 쓴 돈을 받으려고 했지만 장관영은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나면서 장관영은 도리어 왕경을 매질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대에서 시작하여 10대, 20대, 30대로 늘어나면서 한 달 동안 3백여 대를 맞았다.
왕경의 두 다리는 문드러졌고, 공단이 준 은자 50냥도 다 써 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 왕경은 본영 서쪽에 있는 무공(武功) 기념비 옆에서 여러 가지 약을 파는 장씨 의원의 점포에 매 맞은 상처에 바를 고약을 사러 갔다.
장의원이 왕경에게 고약을 붙여 주면서 말했다.
“장관영의 처남 방대랑이 지난번에 여기 와서 고약을 사서 오른손목에 붙였는데, 그는 북망산 동쪽 저자거리에서 넘어졌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맞아서 다친 것 같았네.”
왕경이 그 말을 듣고 황망히 물었다.
“소인이 영중에서는 어째서 그를 한 번도 못 봤을까요?”
“그는 장관영의 작은마누라 동생으로 이름이 방원이고, 방부인은 장관영이 제일 총애하는 여인이네.
방대랑은 노름을 좋아하고 창봉도 잘 쓴다고 하네. 누님 덕에 살아가는데, 그 누님은 동생을 항상 잘 돌봐준다고 하네.”
왕경이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지난 날 측백나무 아래에서 손목을 때려 준 놈이 바로 방원이란 놈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장세개가 자신을 괴롭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왕경은 장의원을 작별하고 영중으로 돌아와 은밀히 관영의 심부름을 하는 아이를 불러 술과 고기를 사 먹이고 돈도 몇 푼 쥐어주고서 방원에 대해 상세히 물어 보았다.
아이가 하는 말이 앞서 장의원이 한 말과 똑같았다.
그리고 아이는 몇 마디 덧붙여 말했다.
“방원이 얼마 전에 북망산 동쪽 저자거리에서 맞고 돌아와 관영상공께 원한을 갚아달라고 했어요. 아저씨가 지독한 매를 맞은 것도 그 때문인데, 매를 면하기 어려울 거예요.”
아이에게 자세히 물어본 왕경은 방으로 돌아와 탄식하며 말했다.
“벼슬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세도가 무섭구나! 지난 날 우연히 실언하여 그놈과 시비한 것이 문제였구나.
봉으로는 그놈을 이겼지만 관영이 사랑하는 사람의 형제일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놈이 나를 이렇게 괴롭힌다면, 다른 곳으로 도망쳐서 달리 방법을 찾아야겠다.”
왕경은 몰래 거리로 나가 날카로운 칼을 하나 사서 몸에 감추어 예측하지 못한 일을 방비하고자 하였다.
그 후로 또 10여 일이 지났는데, 다행히 관영이 부르지 않아 매 맞은 상처도 어느 정도 낫게 되었다.
어느 날 장관영이 또 왕경을 불러 비단 두 필을 사오라고 하였다.
왕경은 생각한 바가 있어 지체하지 않고 급히 점포에 가서 비단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장관영은 대청에 앉아 있었다.
왕경이 비단을 바치자 장세개는 비단 색깔이 안 좋다는 둥 길이가 짧다는 둥 꽃무늬가 구식이라는 둥 험을 잡다가 큰소리로 왕경을 꾸짖었다.
“이 간땡이가 부은 종놈아! 네놈은 죄수로서 본래 물을 긷거나 돌을 나르거나 아니면 쇠사슬에 묶여 있어야 할 놈이다.
그런데 지금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너를 잘 봐 주려는 것인데, 도둑 근성이 뼈까지 밴 네놈은 그것도 모르는구나!”
욕을 먹은 왕경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 없이 꽂아 놓은 촛대처럼 서서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장세개가 소리쳤다.
“매질은 잠시 멈추어 줄 테니 빨리 가서 비단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 오너라. 저녁까지 돌아와서 보고하도록 해라.
만약 조금이라도 늦으면, 그때는 네놈 목숨도 끝장날 줄 알아라!”
왕경은 할 수 없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전당포에 가서 돈 2관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비단 점포로 가서 돈을 더 얹어 좋은 비단으로 바꾸어 본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많이 걸려 이미 등불을 켠 뒤여서 영문은 닫혀 있었다.
당직 군졸이 말했다.
“캄캄한 밤에 누가 책임을 지고 자네를 안으로 들일 수 있겠는가?”
왕경이 말했다.
“관영상공의 심부름을 갔다 오는 길이오.”
군졸은 왕경의 사정을 들어주지 않았다.
왕경은 남아 있던 돈을 군졸에게 주고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또 한 번 가로막히고 말았다.
비단을 들고 안채 문 앞에 이르자, 문지기가 말했다.
“관영상공께서 큰 마님과 다투시고 뒤채의 작은 마님 방으로 가셨네. 큰 마님이 화가 잔뜩 나셨는데, 누가 감히 자네 말을 전하겠는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왕경은 생각했다.
“상공이 저녁까지 돌아와 보고하라고 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나를 막는 것일까? 분명히 일부러 나를 해치려는 것이 틀림없다. 내일 그 지독한 매질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내 목숨이 그 씨팔놈 손에서 끝장나게 생겼네. 내가 저놈에게 3백 대를 맞았으니 그때 한 대 맞은 보복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지난번에 공정에게서 많은 은자를 받고서도, 오늘 이렇게 안면을 바꾸고 나를 괴롭힌단 말인가!”
왕경은 어릴 적부터 악독한 놈이어서 그를 낳아준 부모도 건드리지 못하는 놈이었다.
그 성질이 다시 살아나 혼자 말했다.
“원한이 작으면 군자가 아니고, 독하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일단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 233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