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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알고 보면 사회 생활도 잘하셨던

고수# 2023. 9. 4. 19:55

 

일본과의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595년

체찰사 우의정 이원익이 삼남 지방

군정을 시찰하러 한산도에 방문함

이원익이 한산도 통제영의 완벽한

방비에 흡족해하고

이튿날 출발하려 할 즈음에

이순신이 넌지시 말을 건넴

 

이순신:

"체찰사께서 이렇게

친히 방문해 주셨는데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푸셔서

성상의 은택을 보여주심이 어떻습니까?"

 

이원익:

"통제사의 뜻은 좋으나 내가

아무런 준비를 못해왔소

 

(ㅅㅂ 빈손으로 온 거 보고도 그런 말하냐?)"

 

이순신:

“제가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대감이 허락만 해주시면 됩니다”

 

이 말에 체찰사 이원익은 매우

기뻐하며 명령을 내렸고

그날 소 30마리를 잡고 준비해 놓은 술과

음식으로 병사들에게 성대하게 체찰사 주관 잔치를 벌임

 

당시 벼슬아치들의 지방 시찰은

순방길에 수령을 쥐어 짜내서 그들이 바치는

뇌물을 챙기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은 이원익 대감이 몇 안 되는

청렴한 재상인 거 알고 있었으니

뇌물대신 체찰사 체면 세워주고 병사들

배불리 먹이는 현명한 일처리 한 거지

 

훗날 이순신이 모함으로 잡혀왔을 때

이순신을 적극 변호해 준 조정 대신

중 한 명이 이원익이었는데

이순신의 사람 됨됨이를 잘 알고

계셨던 것도 그 이유였을 거임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이순신장군은

그저 대쪽 같고 근엄한 면만 부각되지만

사실 융통성 있고 정 많은 성격이기도 하셨음

 

 

체찰사 [體察使]

조선 시대, 외적이 침입하거나 내란이 일어나

 등의 비상시에 임명되어 군대를 거느려 지휘하던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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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의 영의정을 하면서 두 칸의 초가집에 살았다 

청빈 이원익(李元翼)의 호는 오리(梧里), 자는 공려(公勵)이다.

1547년(명종 2) 태어난 이원익은 1634년(인조 12)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격동하는 시대를 맞아 조선을 지탱하였다.

그는 반세기가 넘도록 조정의 핵심 관료로 활약하며 임진왜란

(壬辰倭亂), 인조반정(仁祖反正), 정묘호란(丁卯胡亂) 등 굵직한

사건을 연달아 맞아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고군분투하였다.

이러한 이원익의 노력이 주춧돌이 되어 조선은 양란의

피해를 극복하고 다시 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