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 복이 와요
60년대 중반 나 어린 시절의 설 명절.
고수#
2023. 1. 21. 19:26
점점 잊혀가는 기억이 아쉬워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고 싶었다.
60년대 나 어린 시절의 설명절.
요즘 아이들처럼 명절
한복이라는 것은 입어보지 못했다.
단지 아들이 6명이나 되다 보니 형님들이 입다가
물려받은 옷을 적당히 손을 보면 내 것이 되었다.
당시에는 옷 속에 솜이 들어 있어 조금
비를 맞으면 옷이 무거워 지곤 했다.
설날이 다가오면 어머니를 도와드린 기억들이 있다.
우선 설이 오기 전에 찾아오는 손님도
없지만 집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제일 먼저 청소하는 것이 방안의 창문이다.
창문은 창호지를 나무창살에 바른 것인데 지난
한 해 더러운 먼지가 많이 껴 있으니
설날을 맞이하여 그 문을 떼 내어
창에 물을 뿌려 두었다가 한참
지난 뒤에 종이를 다 뜯어 내고 창틀을 닦는다.
그리고는 풀칠한 창호지를 문에
붙이고 약간 모양을 내기
위해 창호지로 작은 무늬를 만들어 창호지에 붙인다.
대문 밖에 그늘진 벽에 문을 세워 놓고 널어놓아 어느
정도 마르면 문틀에 고정한다.
며칠 뒤면 그 창호지를 손톱으로 톡톡
두들기면 탱탱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날 2~3일 전부터 쌀가마니에서 쌀을
커다란 고무 대야에 붓는다.
그러면 형제들이 대야에 둘러앉아 쌀이
아닌 불순물 즉 뉘를 골라냈다.
그렇게 골란 낸 뒤 쌀을 씻어 한 밤 지새우고는
다음 날 방앗간으로 간다.
설날 전전날이라 동네 사람들이 너도 나도
그렇게 쌀이 든 대야를
방앗간 기계 앞에 줄을 세운다.
그걸 누가 새치기하지 않게 기다리는
것을 아들들 몫이었다.
우리 쌀이 들어가고 두 구멍에서 흰 떡가래가
줄줄이 나오면
가위로 그걸 잘라 우리 대야에 넣어 주었다.
그게 끝이 아니다.
그런 떡가래를 가지고 와 우선은 조금 말려야 한다.
떡국을 만들기 위해 떡을 조금 굳혀야
떡이 잘 썰어지기 때문이다.
이 일에 온 형제들이 다 달라붙는다.
또한 만두를 빚어야 했다.
어머니가 누님과 함께 만두 속을 만들면 형제들은
둥그렇게 둘러앉아 만두를 빚었다.
어머니나 누님이 빚는 만두는 모양도 같고 예쁜데 남자
형제들이 만든 만두는 늘 울퉁불퉁.
그래도 뱃속에 들어가는 것은 똑같다.
명절날 아침 다 같이 아침을 먹고 상을
치우고 부모님께 세배를 해야 한다.
형제들 세배하면 세뱃돈은 3원에서 5원.
당시는 1원짜리도 지폐였다. 빨간색의 지폐.
그 안에 실이 있어 손가락으로 잡아 빼곤 했다.
학생이 무슨 돈이 필요 있느냐며 세뱃돈은 물론이고
용돈을 거의 주지 않으셨기에 설날에
주는 돈이 전부였다.
그것도 중학생 이후로는 학생이 돈이 필요
없다며 세뱃돈도 안 주셨다.
내 평생 부모님께 받은 최고액의 세뱃돈은
3원인지 5원인지 가물가물하다.
그리고는 동네 어른들께 세배를 다녀도
멀리 가지는 못했고
어쩌다가 버스 타고 갈 수 있는 거리의 큰고모님께
가면 그래도 세뱃돈이 조금 푸짐했다.
설날에 받은 세뱃돈으로 반드시 가는
곳이 바로 극장이다.
당시는 극장 입장이 영화 횟수에 따라
입장하는 것이 아니고
영화가 이미 시작되고 한참 지났어도
무조건 입장했다.
좌석제도 아니었으니 인원은 그냥
극장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최대의 인원을 집어넣었다.
그러면 영화를 중간부터 보다가 끝나면
기다렸다가 다음 상영의
중간 부분까지 보았을 때 나오곤 했었다.
어느 날 그 극장에서 사람들이 밀려다니는
바닥에 50원짜리 지폐가
떨어진 걸 알고 그걸 주으려고 했으나 사람들의
힘에 떠밀려 결국 나는 멀어져 가야만 했다.
명절에는 라디오에서 늘 장화홍련전,
흥부전 등의 판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집집마다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라,
우리 동네에서는
동네 반장인 우리 집만이 동사무소에서 준
스피커를 가지고 있어
동사무소에서 케이블을 통해 틀어 주는
방송을 그런 프로그램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 판소리를 어머님의 무릎 위에
누워서 들은 기억이 있다.
명절 때는 동네에서 제기차기나
연날리기를 하곤 했다.
왜 추운 겨울에 그렇게 손이 시린
연날기를 했는지...
아마 겨울바람이 여름보다 강해서
그렇게 겨울 놀이가 된 것 같다.
겨울에는 비탈진 골목에서 미끄럼을
타면 어른들에게 혼나곤 했다.
길도 좁은데 미끄럼으로 만들어 놓아
넘어져서 팔다리 부러진다고..
그곳에 연탄재를 뿌려 놓으면
우리 놀이터는 끝이 났다.
썰매는 탈 곳이 없으니 작은 개천에서 탔다.
당시는 명절이라고 어디 멀리
간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올 명절 때는 우리들이 어떻게 자라고 놀았는지
형님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