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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할, 너무나 어이없고 슬픈 이야기!
고수#
2023. 1. 13. 19:48
초롱초롱 박철홍 지금도 흐른다! 467
ㅡ 한반도 분할, 너무나 어이없고 슬픈 이야기!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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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북한의 무인기 영공 침범에 '응징', '보복' 등 연일 강한 표현을 쏟아내며 강력한 대응을 천명했다. 지난 정부의 유화적인 대북정책을 비판하기도 한 윤 대통령이 '힘에 의한 평화'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요즘 남북관계가 경색을 넘어 응징 보복등 '전쟁불사'라는 말이 우리나라 최고위층으로 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의 옳고 그름을 말 하자는 거 아닙니다.
힘에 의한 평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장된 힘을 믿고 최고위층이 자칫 잘못된 판단이라도 한다면 우리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힘에 의한 평화를 위해 내부적으로는 반드시 힘은 길러야 하겠지만 그러한 것을 공개적으로 표명해 국민들에게 괜한 전쟁에 대한 공포를 줄 필요는 없다 봅니다.
어떤 시대이던 한 나라나 한 조직을 책임지는 최고위층 판단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위기시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최고 위기시 현명한 최고위층을 가질 복이 지지리도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선조, 병자호란 인조, 구한말 고종, 6.25 당시 이승만!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 최고 비극은 38선 분단입니다. 그 비극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윤대통령의 힘에 의한 평화 응징 보복등 전쟁불사도 그 비극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분단의 비극이 참 어이없고 슬프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위기시 최고위층에 대한 복이 지지리 없는 것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대외에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분단의 비극은 해방 전후 당시 미국의 조선에대한 엄청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아니 무지라기 보다는 미국은 조선에 거의 관심이 없었지요.
1945년 8.15 해방 전후에
당시 소련은 역사적으로 조선과 연관이 많고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소련군이 엄청난 빠른 행보로 한반도에 진입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조선에 무지하고 관심이 없던 미국은 한반도에 들어 오지 않고 있다가 소련군 발빠른 행보에 깜짝 놀라 이때서야 소련을 제지하려 합니다.
이때도 조선을 생각해서 그랬다기 보다는 조선이 소련에 의해 공산화 되면 일본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걱정때문 이었습니다.
소련은 38선 이남까지 진주하려다 미국의 제지로 곧 38선 이북으로 철수합니다.
이로써 소련군의 38선 이북지역 진주는 종료됩니다.
미국은 그로부터도 한 참 뒤인 1945년 9월 8일 미군을 인천항에 보내 상륙시켰습니다.
그러나 미군과 조선인 첫 만남은 불행으로 끝나고 맙니다.
미군기와 전투기, 탱크 엄호 아래 4만 5000명 군단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한 ‘미 점령군’은 일제 경찰과 헌병 손을 빌어 첫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일제 경찰과 헌병대는 환영 나온 인천시민을 향해 질서 유지라는 이름 아래 총을 쏘아 군중 2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게 합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해방시켜 준 은혜 나라 미군을 환영하러 왔다가 일제 경찰 총에 맞아 죽는 비극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 최고위층이 된 미군 사령관 하지는 일본경찰에게 잘 했다고 칭송을 하며 당분간 조선 치안유지를 부탁합니다.
미국 사령관 하지! 참말 우리나라는 지지리 최고위층 복도 없지요?
그래서 악질 친일경찰들은 해방 후에도 살아남아 더 악질적인 짓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이후 경찰은 친일경찰 출신으로 조직을 만들어 갑니다. 당시 경감 이상 경찰간부 80%가 친일경찰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은 9-10일 사이 서울에 입성합니다. 서울 입성으로 미국의 실질적 남한 지배 역사인 미군정 시대가 열립니다.
미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38선 이남에 들어와 “승전군(미군)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는 맥아더의 포고령대로 조선의 ‘해방자’가 아니라 ‘점령자’로 스스로를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미소는 왜 38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진군을 멈추었을까요?
어떻게 해서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지고 미, 소가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대치하게 되었을까요?
그 답을 알고나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현재 가장 큰 아픔이자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6.25를 일으킨 원인이 된 38선이 그것을 결정하는 미군 최고위층에 의해 정말 어처구니 없이 결정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윤대통령 말처럼 진짜 우리만 힘 기르고 보복 응징 잘 한다고 한반도에 평화가 올까요?
너무 가슴아픈 일이지만 이 한반도는 지리적 문제인지,
아님 우리 민족성의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도 모르게 운명이 결정되곤 했습니다.
특히 구한말 역사는 그걸 노골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런 일은 우리 현대사 속에도 너무 많습니다.
오바마ㆍ트럼프의 북한 선제타격론도 우리와는 전혀 상의가 안 된 상태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계획했다고 요즘와서야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섬뜩한 이야기입니다.
구한말 '가쓰라테프토 밀약'으로 미국은 일본이 한반도를 먹는 것을 세계 최초로 인정해주지만 우리는 까맣게 모르고 미국만 찾아다니며 독립을 애걸합니다.
일제로부터 우리나라 독립도 우리는 제외 된 채 미국,영국, 소련이 얄타에서 모여 논의되었습니다.
해방 후 신탁통치 안도 우리는 전혀 모르게 미국ㆍ소련에 의해서 결정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만 친탁ㆍ반탁으로 나누어져 우리끼리 피 터지게 싸웠습니다.
우리 민족의 가장 비극적인 3.8선!
진짜 우리 민족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채 너무도 어처구니 없이 한 사람 잘못된 판단에 의해 결정 되었습니다.
아래는 그 너무나도 어이없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좀 길지만 당시 남북정상회담 있기 직전, 전남광주 일간지 신문에 제가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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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분할, 너무나도 어이없는 이야기!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되던 날, (1945년 8월10일) 미군의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한반도의 운명도 결정되고 있었다.
1945년 년 초부터 일본의 항복은 시간 문제였다. 이 사실은 패전국 일본도 승전국 미국및 연합군 다 알고 있었다. 우리민족만 모르고 있었다.
우리나라 광복은 우리에게는 도둑처럼 슬그머니 왔다.
도둑처럼 맞이한 해방이었지만 우리 민족은 그저 좋아서 온 나라가 만세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할 때 우리나라는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미군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우리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반토막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이 사실 또한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정설로 굳어져온 분단 경위는 2차 세계대전 전승국, 그중에서 전후 처리 과정에서 라이벌로 등장한 미국과 소련이 상호 경쟁과 타협 산물로 38선을 그었다는 것이었다.
지도를 참고해가며 한반도에 직접 38선을 그은 장본인은 미국의 딘 러스크로 알려져 있다. 선을 그은 정확한 날짜는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된 날(1945년 8월10일) 자정께였던 것으로 브루스 커밍스 등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할했던 이 분단선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미국은 당시 소련의 일본에 대한 참전이 필요했다. 원폭으로 전쟁을 끝냈줄 모르고 일본 본토로 상륙하려면 엄청난 미국 군인들을 희생시켜야 했다. 그런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소련군 일본 참전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로 그럴 필요성이 없어졌다. 소련은 그 점을 눈치채고 극동에서 아주 발빠르게 움직였다.
역사적으로도 한반도 분할 협상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1894년과 1903년 각각 중·일, 러·일간에 한반도 분할문제를 두고 열린 비밀회담에서 이미 거론된 적이 있었다.
얼마 전 KBS에서 제작한 '다큐 공감'이라는 프로에서 '운명의 북위 1도'라는 편을 IPTV를 통해 보았다.
그 프로에서 그 당시 미군전략기획단의 일원으로 있었고 '운명의 북위1도 ' 라는 책을 쓴 에드워드 로우니 전직 미군 장성은 주장한다.
1945년 8월중 미군전략기획단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팀은 일본이 항복 한 후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논의한다. 미군 군사 전문가들은 한반도를 분할하는 것을 기정사실 화 하고 있었다.
단지 어느 부분에서 분할 할 것인지 한반도 지도를 놔두고 고민한다. 여러상황을 고려하여 북위 39도선이 최적이라고 결정한다. 그리고 그 팀의 가장 상관이고 최고위층인 링컨장군에게 보고 한다.
그러나 링컨 장군은 부하들이 고심 끝에 결정한 39도선을 거절한다. 38도선으로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 이유가 정말 어이없다.
링컨장군이 신봉하는 스파이크만이라는 학자의 학설이 있었는데 세계 주요사적인 사건 90%가 북위 38선 부근에서 일어났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결과론적으로는 링컨장군 말이 맞아 떨어졌다. 38선때문에 6.25가 일어났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어처구니 없게 한 사람의 고정된 관념에 의해 39도선이 38도선으로 결정되고 6.25같은 엄청난 비극이 일어나고 만다.
북위 1도 차이로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아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39도선으로 했을 경우 북쪽으로 상당부분 올라가 평양 바로 밑이다.
그 부분은 한반도의 허리 부분에 해당되어 횡단으로 가장 짧다. 북쪽에서 침략이 있을 경우 방어하기에도 아주 적당하다. 미군전략기획단은 그런 점까지 고려해서 39도선으로 결정했다.
만약 미군전략기획단 처음 의도대로 39도선으로 했다면 '북한도 그런 상황에서는 전쟁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6.25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는 전쟁대신 뭔가 평화적으로 해결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라는 게 미국 군사전문가들 견해였다.
38도 확정은 별도의 미·소간 비밀협약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미·소 간 항복접수구획선으로 제안된 미군전략기획단 건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 정설인 만큼 로우니 장군의 주장은 사실 일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그 당시 한반도를 분할하기로 결정한 사실이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은 미국이 스스로 결정해 소련에 일방 통보했을 뿐이다.
2차세계대전 중 소련은 미국과 같은 편에서 독일을 상대로 싸웠을 뿐, 일본과는 겨우 1주일간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일본과 한반도에 관한 한 소련의 발언권은 거의 없었으므로 38선 이남은 점령하지 말라는 미국 요청을 순순히 받아 들였던 것이다.
사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즉시 일본 본토는 물론 한반도 내의 일본군으로부터도 항복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미군은 그때 한반도에서 1천km 남쪽 멀리 오끼나와 섬에 있었다. 또 미군은 주로 일본 본토에 들어가 일본 항복을 받아내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까지 군대를 신속히 보낼 여유가 없었다.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은 신속히 군대를 진입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날(8월9일)에는 벌써 함경북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8월12일에는 청진-나진-웅기-경흥 등을 점령해버렸다. 이런 속도라면 불과 2~3주 사이에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14일(워싱턴 시각) 밤늦게 서둘러 한반도 중간 북위 38도까지만 소련군 남하를 허용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에 통고했다. 소련은 이를 순순히 받아 들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미국이 분할선을 39도로 결정해서 통고 했거나 아예 미국이 조금만 더 신경써서 소련군은 한반도에 진입해선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 했다면 소련은 한반도까지 들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이나 미국 모두 당시는 한반도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우리나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반도의 분할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일본에 있다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한반도 분할의 단초를 연 문건이 1945년 3월13일 당시 일본의 현역 해군 소장이자 종전 당시 일본 해군성 교육국장이었던 다카키 소키치였다 다카키가 육필로 완성한 <주칸호코구안(中間報告案·중간보고 초안)>였다는 것이다.
즉 일본 군국주의자들 내부에서 한반도 분할을 일본이 항복하기도 전부터 항복을 예상하고 논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 1905) 전야에 툭하면 들먹거렸던 ‘38선 분할안’을 구체적인 고려 대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문건의 핵심 요지는 일본이 전쟁에서 질 때 지더라도, 동북아에서 일본이 누렸던 기득권을 송두리째 미국에 넘겨줘 미국이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국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소련과 손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미국 일본 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일본은 소련이 참전할 때까지 항복을 늦추고 있었으며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관동군이 100만이나 되었지만 소련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을 전혀 제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앞서 말했지만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날(8월9일)에는 벌써 함경북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8월12일에는 청진-나진-웅기-경흥 등을 점령해 버렸는데도 일본 100만 관동군은 꿈쩍도 안한다. 그런 관동군에 소련군이 더 어리둥절해 하고 놀랄 정도였다.
다카키는 일본 ‘제국 해군’의 지도적 전략가로 활약했으며, 1939년께부터 일본의 세계 전략으로추축국(독일·이탈리아·일본)과 소련을 묶어, 영·미 동맹에 대항하는 방안을 입안해 추진했던 인물이다.
이처럼 한반도 분할이나 38도선이나 39도선이 우리 민족 비극이 우리는 전혀 모르는 채
몇 사람 최고위층에 의해서 결정 되어 버렸다는 너무나도 어이없고 슬픈 이야기이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남북정상회담이 잘 되어서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