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22. 19:52ㆍ초 한지/김삿갓 1편
방랑 시인(放浪詩人) 김삿갓 - (1) ※ <전편(全篇) 미성년자(未成年者) 불가(不可>
* 밝혀진 집안 내력(來歷)의 비밀(祕密) *
어머니로 부터 조부(祖父) 김익순(金益淳)에 대한 내력을 듣게된 병연(炳淵)은 비틀거리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벽(壁)을 바라보고 꿇어 앉아, 머리가 방바닥에 닿을듯 고개를 꺽고 있었다. 희미한 등잔불은 가끔씩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출렁거렸다.
어디선가 산짐승 우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여보, 밤이 깊었어요." 남편이 평소(平素)와 전혀 다른 실성(失性)한 모습으로 벽(壁)을 향(向)해 앉아 있자 병연(炳淵)의 아내도 물끄러미 앉아 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오늘 집에 오실때 백일장(白日場)에 참례(僭禮)하여 장원급제(壯元及第)하셨다고 좋아 하시더니".....
병연(炳淵)의 아내는 불과(不過) 한 시각(一時刻) 전(全)에 남편(男便) 모습이 어머니 방(房)을 다녀 온 후 돌변(突變)한 것이 의아(疑訝) 했다.
그러나 병연(炳淵)은 대답(對答)이 없었다.
"여보, 어서 자리에 드세요." 아내가 다시 말하자 병연(炳淵)은 그제서야 아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잔불로 어두운 방안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음을 알수 있었다.
"당신(當身) 아직까지 자지 않았구료."
"당신이 그러고 계시는데 제가 어찌 잠자리에 들 수 있겠어요."
"그렇군 ,내 미안하오." 자조(自嘲)섞인 말투로 대답한 병연(炳淵)은 다시 아무 말없이 공연(空然)스레 고개를 몇번 끄덕이다.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아내에게 감추려는 듯 다시 시선(視線)을 천정(天井)을 향했다.
그리곤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천정(天井)으로 시선(視線)을 향(向)했다.
"여보!"
남편(男便)의 부름에 아내는 근심 어린 표정(表情)으로 얼굴과 시선(視線)을 병연(炳淵)의 등 뒤로 향했다.
"오늘, 내 당신(當身)을 앞으로 고생(苦生) 시키지 않고 호강(炳淵)시키리라 생각되더니 모두가 허사(苦生)가 된 것 같구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남편(男便)의 다정(多情)한 말을 듣자 더욱 궁금한 아내가 가슴 떨려하며 되물었다.
"장원급제(壯元及第)의 기쁨도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고 말았소. 벼슬길도 이제 아득하게 멀어지고.. 아까 부터 모든 것이 헛된 꿈이요 뜬구름을 쫒는 신세(身世)가 된 기분(氣分)이오."
"저는 연유(緣由)를 모르겠습니다" 아내의 궁금증은 다시 입을 다물고 있는 병연의 모습으로 더욱 커졌다.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오." 아내가 뒤이어 아무말 없자 병연(炳淵)은 한참후 입을 열었다.
"오늘, 백일장(白日場)에 시제(試題)는 논공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이었소."
"제가 그런 어려운 글을 아나요" ..
아내가 이렇듯 대답하자 병연(炳淵)은 당연(當然)하듯 고개를 몇번 끄덕인후 다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입을연 병연(炳淵)은,
"그 시제(試題)로 장원(壯元이 되었으나 알고보니 내가 절절히 탄핵했던 김익순이 사실은 나의 조부였소." 병연의 아내는 이제서야 남편이 그토록 괴로워한 까닭을 헤아린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안(未安)하오, 당신(當身)을 고생(苦生)시켜서" ..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남편의 말을 들으니 병연(炳淵)의 아내는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여보, 저..."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린다.
"무슨 말이오?" 병연(炳淵)은 천정을 쳐다본 채 물었다.
아내는 몇번인가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 아기를 가진것 같아요."
"아기를?" 병연(炳淵)은 이제서야 아내를 향하여 돌아서며 자세를 고쳐 앉아 아내에게로 얼굴을 향했다.
병연(炳淵)이 마주보자 아내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깊게 떨구고 있었다.
그런 아내를 한동안 아무말 없이 바라보던 병연(炳淵)의 입가에는 쓸쓸한 미소(微笑)가 번졌다.
생각해 보면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겠다, 아내는 태기(胎氣)가 있겠다.
이 얼마나 경사(慶事)스러운 일 인가?
그러나 병연(炳淵)에게는 기쁨보다 슬픔이 앞섰다.
그것은 아기가 태어나더라도 미천(微賤)한 아비로 인해 신분(身分)이 제한(制限)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알고 있기에 아내의 말을 듣고도 기쁨에 앞서 가슴만 더욱 메어왔다.
병연(炳淵)은 아내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뜨거운 눈물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그것은 눈물이 아니라 차라리 피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병연(炳淵)은 밤새 한잠 못자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해가 산(山)마루를 넘어왔다.
사립문 밖으로 나온 병연(炳淵)의 눈에는 세상(世上)이 온통 새벽 안개속에 묻힌듯 뿌옇게 보였다.
어제 이시각의 병연(炳淵)은 싱그러운 아침 햇살에 소생(蘇生)하는 만물(萬物)처럼 야심찬 사나이였다.
그러나 지금(只今)은 가슴속은 희뿌연 재만 남고 희망(希望)도 용기(勇氣)도 없는 타락 (墮落)한 몰골이었다.
잡목(雜木) 숲을 얼마나 걸어다녔는지 모른다.
병연(炳淵)은 심(甚)한 피로감(疲勞感)을 느꼈다
"아!....." 무거운 신음(呻吟)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느새 그는 잠이들어 있었다.
잠들었다기 보다 허탈감(虛脫感)이 주는 공허(空虛)함에 가사(假死) 상태(狀態)였다.
종달새 한마리가 하늘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병연(炳淵)은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해는 이미 중천(中天) 높이 솟아 있었고 봄볓은 따사롭게 움트는 나뭇가지를 비추고 있었다.
넋을 잃고 망연(茫然)히 눈앞에 펼쳐진 봄 풍경(風景)을 바라보던 병연(炳淵)은 문득(聞得) 시(詩)한 수(數)가 떠올랐다.
초색청청 유색황 (草色靑靑 柳色黃), 도화력난 이화향 (桃花歷亂 梨花香)
동풍불위 취수거 (東風不爲 吹愁去), 춘일편능 야한장 (春日偏能 惹恨長)
풀빛은 푸르나 버들은 아직 황색인데, 복사꽃은 만발했고 배꽃은 향기롭네
동풍은 나의 시름을 불어내어 갈 줄 모르고, 봄날은 한도 많고 길기도 하여라.
지금(只今) 처(處)한 자신(自身)의 심경(心境)을 드러낸 시(詩)였다
그렇다, 이 화창(和暢)한 봄날은 그에게는 한(恨)도 많고 지루하도록 길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문득 단시(短詩) 한 귀절(句節)이 떠 올라 읊조리는데,
만사 개유정(萬事 皆有定), 부생 공자망(浮生 空自忙)
모든 일은 운명(運命)에 따라 정(定)해지건만, 사람이 공연(空然)히 떠돌며 찾는구나.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