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79화
2021. 8. 30. 08:23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79화
☞ 영웅호걸 영포의 절명
그러자 대장들이 추격을 멈추고 부리나케 달려와 유방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부랴부랴 진중으로 모시고 돌아와 전의(戰醫)에게 진찰을 받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중상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유방은 이를 갈며 대장들에게 말한다.
“영포란 놈은 내가 중상을 입은 줄 알고 안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이 기회에 영포를 철저하게 때려 부수도록 하라.”
그러나 진평이 만류하며 말한다.
“지금 당장 공격을 퍼부어서는 안 되옵니다. 우리가 며칠 동안 잠자코 있으면 영포는 폐하께서 중태에 빠지신 줄로 알고 자기편에서 먼저 공격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기회를 이용해 그들을 철저하게 때려 부숴야 합니다.”
유방은 진평의 계교에 감탄해 마지않으며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그러면 영포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조참은 3만 군사를 거느리고 장사(長沙)로 가서 적의 양도(糧道)를 차단해 버려라.
그리고 관영은 2만 군사를 거느리고 육안(陸安)으로 가서 영포의 가족들을 납치해 오고, 기통과 주발은 3만 군사를 거느리고 회강(淮江)으로 가서 적의 도강(渡江)에 대비하고 있으라!”
한편, 영포는 유방이 필연코 보복전(報復戰)을 전개해 오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수비 태세를 물샐 틈 없이 갖춰 놓고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유방이 며칠이 지나도 싸움을 걸어오지 않자, 영포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적들이 보복전을 걸어오지 않는 것을 보니 유방이 어쩌면 이번 전상(戰傷)으로 중태에 빠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제에 우리가 선제공격을 통하여 저들을 철저하게 때려 부숴야 할 게 아닌가?‘
영포는 그런 생각이 들어 삼군에 부랴부랴 동원령을 내리니 난포가 아뢴다.
“유방에게 활을 쏜 사람은 저 자신이온데, 유방은 결코 중상을 입은 것이 아니옵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적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저들은 필시 우리를 속이는 계략을 쓰고 있는 듯싶사옵니다.
그러하니 저들의 계략을 모르고 함부로 덤비는 것은 크게 경계하여야 할 일이옵니다.”
영포는 난포의 충고를 옳게 여겨 적의 반응을 알아보려고 군사들을 보내 일부러 집적대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집적거려도 한군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할 뿐 대항하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영포가 며칠을 두고 같은 전략을 펼쳐 보았으나 한군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영포는 마침내 자신이 생겼다.
“이렇듯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유방이 병석에 누워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오늘 밤을 기해 총공격을 퍼부어 적을 일거에 괴멸시켜 버리기로 하자.”
그러나 난포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다시 간한다.
“유방의 모사인 진평은 귀신같은 사람입니다. 그들이 무슨 꿍꿍이를 하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으니 시간을 두고 좀 더 정확한 실태를 알아내야 합니다.”
난포의 입에서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마가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오더니
“대왕마마! 큰일 났사옵니다!”
하고 아뢰는 것이 아닌가?
영포는 눈을 크게 뜨며 말한다.
“이놈아! 뭐가 어째서 큰일이 났다고 하느냐? 허둥거리지만 말고 분명하게 말해라.”
비마는 몸을 벌벌 떨며 아뢴다.
“대왕마마! 적장 기통이 후방으로 우회하여 우리의 본진(本陳)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영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급하게 묻는다.
“뭐야? 적이 우리 본진을 점령했다고? 그게 사실이냐?”
“그뿐이 아니옵니다. 적장 주발은 회강(淮江)을 점령하였고, 적장 관영은 육안(陸安)으로 달려가 대왕의 가족들을 송두리째 납치해 갔사옵니다.”
가족들이 납치되었다는 소리에 영포는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뭐야? 놈들이 나의 가족들을 송두리째 납치해 갔다고?”
“그뿐만이 아니옵니다. 또 있사옵니다.”
“이놈아! 뭐가 또 있다는 말이냐? 지체 말고 어서 말해라!”
영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고, 비마가 몸을 떨며 다시 아뢴다.
“적장 조참이 장사(長沙)에 진출하여 우리의 양도(糧道)를 차단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싸우고 싶어도 군량(軍糧)이 없어 싸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영포는 너무도 놀라운 소식에 눈앞이 캄캄해 왔다.
가족들은 납치를 당하고, 본진은 빼앗겨 버리고, 게다가 군량미를 운반하던 수송로까지 차단되어 버렸다면 무슨 힘으로 싸울 수가 있을 것인가?
적은 그와 같이 엄청난 작전을 비밀리에 수행하느라고 그동안 침묵을 지켜왔건만, 영포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유방이 중태에 빠졌다’고 여기고 있었으니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저러나 사태가 이 꼴이 되었으니 이제는 군사들을 전면적으로 철수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영포가 눈물을 머금고 철수를 시작하는데, 별안간 저 멀리 숲속에서 번쾌가 군사들을 질풍같이 몰아쳐 나오면서
“영포는 듣거라. 너는 지금이라도 깨끗이 항복하여 주상에게 용서를 빌도록 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네 목숨이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벼락같은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닌가!
영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가족까지 모두 납치된 이 판국에 항복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번쾌에게 덤벼들었다.
두 장수가 불을 뿜는 혈전을 거듭하기를 50여 합. 싸움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는데, 그러는 동안에 한나라 군사들이 사방에서 자꾸만 모여들고 있었다.
영포는 마침내 1백여 기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강을 건너 오(吳)나라로 쫓기기 시작하였다.
오나라 성주(城主) 오예(吳芮)와는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예는 사냥을 나가고 집에 없었다.
오예의 조카 오성(吳成)이 영포를 사랑방으로 맞아들여 묻는다.
“대왕께서는 아무 예고도 없이 별안간 무슨 일로 내림하셨습니까?”
영포는 유방과 싸우다가 쫓겨 오게 된 사유를 솔직하게 말해 주고 난 뒤
“나는 당분간 이곳에 피신해 있다가 자네 아저씨와 힘을 합하여 유방을 쳐부수기로 할 테니 자네는 그리 알고 있게.”
하고 말하자, 오성은 그 말을 듣고 내심 크게 놀랐다.
‘역적을 집에 숨겨 두었다가 유방에게 발각되는 날이면 우리 일가족도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영포를 죽여 그의 수급을 유방에게 갖다 바치면 우리 가문에는 커다란 영광이 돌아오게 될 것이 아닌가?‘
오성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아저씨가 돌아오기 전에 영포를 죽여 버릴 결심을 굳히고, 영포에게 술을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는 내일이나 돌아오시게 될 테니 오늘 밤은 술을 드시고, 피곤한 몸을 편히 쉬도록 하십시오.”
영포는 워낙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주호(酒豪)인데다 한군과의 패전으로 마음이 몹시 울적하던 판인지라 오성이 권하는 대로 술을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
영포는 술이 몹시 취하였다.
그러자 납치되어 간 가족들 생각이 새삼스러워서 울분을 토하며 술주정을 하였다.
“유방이란 놈, 어디 두고 보자! 네놈이 내 가족을 납치해 갔으니 나도 언젠가는 네놈의 가족을 납치해다 모조리 죽여 버리리라.”
오성은 그럴수록 위로의 말을 들려주며 자꾸만 술을 권했다.
이윽고 삼경이 되자, 영포는 곤죽이 되어 옆으로 고꾸라지더니 정신없이 코를 골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오성은 이때다 싶어 40여 명의 역사(力士)들을 동원하여 영포의 경호원들부터 모조리 죽이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자기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영포의 목을 한칼에 베어 버렸다.
일세를 풍미한던 효장 영포는 일찍이 산적으로 시작하여 초나라 대장군을 거쳐 회남왕까지 올랐던 그였다.
싸움을 하면 반드시 이겼고, 용맹은 항우와 견줄 수 있는 맹장(猛將)이었다.
그가 한번 호령하면 천군만마가 두려움에 떨던 영웅호걸 영포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영웅호걸이었던 영포가 섣불리 반란을 일으켰다가 무명지사인 오성의 손에 어이없게 죽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오성은 이토록 쉽게 영포의 수급을 손에 넣어버린 것이다.
오성은 곧 한군 본진으로 달려가 유방에게 면회를 요청하였다.
“본인이 역적 영포의 수급을 가지고 왔으니 황제께 직접 헌상하게 해주소서.”
유방은 그 소식을 듣고 오성을 곧 만나려 하려 하자, 진평이 간한다.
“영포의 수급은 신이 검증할 것이오니 폐하께서는 영포의 수급을 직접 보지는 마시옵소서.”
유방은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며 말한다.
“왜 영포의 수급을 못 보게 하는 것이오?”
“영포는 워낙 당대의 효장으로서 깊은 원한을 품고 죽었기 때문에 그의 수급에는 반드시 독기(毒氣)가 서려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 직접 보시면 신기(神氣)를 상하시기 쉬우시옵니다.”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은 매우 고맙소이다. 그러나 역적의 수급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으니 내 눈으로 영포를 확인하고 싶소이다.”
유방은 끝끝내 고집을 부리며 영포의 수급을 직접 보고야 말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입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영포의 수급은 얼마나 험상궂었던지 유방은 그로부터 사흘 동안은 아무 음식도 먹지 못했다.
이리해서 유방은 오성의 공로를 크게 찬양하여 즉석에서 ‘건충후(建忠侯)’라는 파격적인 관작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오성의 숙부인 오예를 강하수(江夏守)로 영전시키고, 자신의 일가인 유비(劉鼻, 맏형의 아들)를 오왕(吳王)에 봉하여 강동 일대를 견고하게 수비하도록 하였다.
- 제 18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