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73

2021. 8. 25. 08:37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73화

☞ 한신의 운명 : 큰일은 작은 것에서 비롯된다.

한편, 한신은 진희가 오랑캐를 토벌하고 대주에 주저앉아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속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형세를 보아 자기는 내부에서 들고 일어나 유방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천하를 대번에 장악할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진희의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유방이 진희의 반란을 토벌한다며 40만 대군을 몰고 친히 원정길에 나서는 것이 아닌가?

한신은 비밀리에 사람을 놓아 양군(兩軍)의 대치상황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심부름을 다녀온 사람이 소식을 알려왔다.

소식에 의하면 진희는 곡양에 진을 치고, 유방은 한단에 진을 치고 첨예하게 대치(對峙) 중이라는 것이 아닌가?
한신은 그 소식을 듣고 혼자 한탄한다.

‘진희가 장강을 앞에 두고 한단에 진을 쳤다면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나, 그와 반대로 한제가 한단에 진을 치고, 진희는 곡양에 진을 치고 있다니 진희가 불리할 것은 확실하다.’

지리(地理)와 병법에 능통한 한신은 양군이 대치하고 있는 장소만 보고도 승부를 예측할 수 있었다.
이에 초조함을 느낀 한신은 진희에게 밀서를 보냈다.

“한제가 지금 귀공을 정벌하려고 대군을 이끌고 그곳으로 달려갔지만, 귀공은 한제와 싸울 생각을 하지 말고 도성으로 직접 쳐들어오시오.
그러면 내가 내부에서 들고 일어나 우리는 한나라를 일거에 뒤집어엎을 수가 있을 것이오.“

한신은 밀서를 심복 부하인 호상(胡祥)에게 주면서 진희에게 급히 전하라고 하였다.
호상은 밀서를 품고 집을 나오다가 또 다른 한신의 부하인 사공저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두 사람은 단짝 술친구였다.
사공저는 호상을 만나기가 무섭게 대뜸 술집으로 잡아끌었다.

“이 사람아! 나는 지금 한신 장군님의 급한 심부름을 가는 길이어서 안 되네.”
그러나 사공저는 호상의 손을 한사코 끌어당기며 말한다.

“예끼, 이 사람! 아무리 급한 심부름이기로 술 한 잔 마실 시간이야 없겠나? 꼭 한 잔만 하고 보내 줄 테니 어서 들어가세.”
이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행길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가 술고래에다 고주망태인지라 술을 일단 입에 댄 이상 한잔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두 사람 간에 주고받는 술이 두 잔 석 잔이 열 잔이 되어 마침내 곤드레만드레 될 때까지 술을 계속해 마시고 말았다.

한편, 한신은 호상을 진희에게 보내 놓고 나서 또 다른 심부름을 시키려고 사공저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사공저는 행방이 묘연하자, 또 다른 하인이 말하기를,

“사공저가 오늘 낮에 행길가 주막에서 호상이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고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공저가 혹시 나의 비밀을 알고, 호상이에게 밀서를 빼앗아 내려고 계획적으로 술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신은 비밀이 탄로 날까 싶어서 사공저가 돌아오기를 눈알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공저는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한신은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초조하였다.
‘만약 내가 진희와 내통하는 사실이 탄로 나게 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한신이 마침내 마당으로 나와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가슴을 졸이고 있을 즈음 사공저는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그런데 사공저는 술이 엉망으로 취해있는 것이 아닌가?
한신은 화가 치밀어 올라 자기도 모르게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아침에 나간 놈이 어디서 무슨 짓을 하다가 술이 떡이 되어 이제야 나타났느냐!”
사공저가 만약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한신에게 감히 말대꾸를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엉망으로 취해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한신에게 대들 듯이 큰소리로 이렇게 외쳐댔다.

“술을 마시다가 좀 늦었기로서니 왜 야단이시오. 내가 무슨 역적모의라도 하다가 돌아왔단 말이오?”
말할 것도 없이 사공저로서는 취중에 되는 대로 씨불여댄 말이었으나 한신은 ‘역적모의’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하였다.

사공저의 입에서 ‘역적모의’라는 말이 취중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지만, 한신으로서는 자신의 비밀을 사공저가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다고 취중의 그를 붙들어 맞대 놓고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기에 한신은 하인을 불러 이렇게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다.

“저놈이 술이 취해 미친 소리를 하고 있으니 자기 집으로 끌어다가 잠을 재우게 하여라.”
한신은 그렇게 둘러대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저놈을 살려 두었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오늘 밤 안으로 저놈을 감쪽같이 죽여 버려야 하겠다.’
하고 결심을 하였다.

사공저를 집으로 쫓아 버리고 내실로 들어오니 마누라 소씨 부인(蘇氏夫人)이 마중 나오며 걱정스럽게 묻는다.

“사공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한밤중에 그렇게 야단을 치셨습니까?”
한신은 지금까지의 경위를 마누라에게 상세하게 말해 주고 나서

“저놈을 살려 두었다가는 큰일이 나겠으니 오늘 밤 안으로 아예 죽여 버려야 하겠소.”
하고 말하자, 소씨 부인은 머리를 흔들며 말한다.

“죽여도 오늘 밤에는 죽이지 마시옵소서. 아무리 감쪽같이 죽여도 오늘 밤에 죽이면, 세상 사람들은 당신이 죽였다고 생각할 것이옵니다.”
한신은 마누라의 충고를 옳게 여겼다.

그래서 사공저를 며칠 후에 죽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런데 그 일이 한신의 운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을 것인가?

한편, 사공저는 집으로 돌아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깨어나니 마누라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남편을 나무란다.

“어젯밤 당신이 한신 장군한테 술주정을 무섭게 했기 때문에 장군이 당신을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을 거예요.
사람이 아무리 술이 취했기로서니 그렇게나 위아래를 몰라보고 막 해댄대요?”
사공저는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면서 말한다.

“내가 한신 장군께 술주정을 하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하나도 기억이 없구먼...”
“아무리 취중이기로 한 장군에게 ‘역적모의’를 했느니 어쩌니 하고 마구 대들었으니 한 장군이 당신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않아요?”
“뭐야? 내가 한 장군을 역적으로 몰아 붙였다고? 내가 아무리 취중이라도 그런 주정을 했을 리가 없을 텐데...”
“뭐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모두가 당신이 그렇게 말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합디다.
그리고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지금 벼슬이 떨어져서 지내는 분에게 ‘역적’ 운운이 뭐예요?
세상에 참! 하여튼 이제는 당신이 크게 경을 치게 생겼으니 지금이라도 급히 손을 써 두세요.
그렇잖으면 당신은 한 장군 손에 죽게 될지도 몰라요.”
이에 사공저는 크게 당황하였다.

‘그렇다면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도망이라도 가야지...’
사공저는 부랴부랴 보따리를 싸들고 도망을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도망을 치면 어디로 갈 것이며, 또 도망을 치게 되면 처자식은 영영 못 만나게 될 게 아닌가?
사공저는 보따리를 싸들고 이리 저리 궁리를 하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옳다! 무턱대고 도망을 갈 것이 아니라, 소하 승상께 부탁해서 한신 장군에게 용서를 빌도록 하자.
승상께서 중간에 나서 주시면, 한신 장군인들 설마 나를 죽이려 들진 않겠지?’
사공저는 죽지 않으려고 그런 방도를 써 보기로 하였다.

다행히 승상 댁에는 전에도 심부름을 수없이 다니던 일이 있었다.
그러기에 부랴부랴 소하 승상을 찾아갔다.

승상 소하는 사공저의 말을 듣고 내심 크게 놀랐다.
그러잖아도 한제는 원정을 떠나며 승상에게

“내가 없는 사이에 한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그의 동태를 엄격히 감시하오.”
하는 특별 부탁까지 하지 않았던가?
소하가 사공저에게 묻는다.

“아무리 취중이기로 네 입에서 ‘역적모의’ 운운한 것은 이만저만한 실언이 아니었구나.
그렇다면 네가 알기에 평소부터 한신 장군한테 그럴만한 어떤 사실이라도 있었던 것이 아니냐?”
사공저는 머리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며 한동안 생각해보다가 자기변호를 위해 이렇게 대답하였다.

“특별히 의혹을 살 만한 일은 없었사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의혹을 살 만한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사옵니다.”
“의혹을 살 만한 일이 전혀 없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소하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하니 사공저는 내친김에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은 한신 장군이 ‘호상’이란 심복 부하를 진희 장군에게 밀사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원정길에 오르신 이 판국에 다른 사람도 아닌 진희에게 밀사를 보낸다는 것은 중대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공저는 취중에 호상에게 무심코 들었던 말을 그대로 고해 버렸다.

그 말을 들은 소하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한신이 진희에게 밀사를 보낼 정도라면, 두 사람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내통을 해온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소하는 사공저를 달래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며 보내 버리고, 대궐로 급히 달려 들어가 여 황후(呂皇后)에게 사실대로 품고하니 여 황후가 크게 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주상께서 원정길에 오르시며 승상과 나를 은밀히 불러 ‘한신의 동태를 각별히 감시하라’고 엄명을 내리신 일이 있지 않소?
그런데 한신이 진희에게 밀사를 보낼 정도로 모의(謨意)가 분명하다면 승상은 한신을 속히 처치해 주시오.”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 제 17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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