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69화
2021. 8. 20. 21:25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69화
☞ 내우외환(內憂外患)
유방은 묵특의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고 나자, 이제야말로 태평성대가 왔는가 싶었다.
그러나 태평성대는 결코 쉽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옛말에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더니 대외적인 우환이 없어지니 내부적으로는 ‘제위 계승’ 문제가 불거졌다.
유방에게는 두 사람의 부인이 있다.
※ 註) 사실은 첩이 여럿 있었음. 정비석의 ‘초한지’는 이렇게 되어 있으니 대략 이해하고 읽어주기 바람.
처음 만난 조강지처(糟糠之妻)는 정실부인(正室夫人)인 여황후(呂皇后)이고, 다른 한 사람은 수수 대전에서 항우에게 참패를 하고 도망을 치다 척씨촌(戚氏村)에서 인연을 맺은 척씨 부인(戚氏夫人)이었다.
여 황후는 나이가 들어 늙고, 척씨 부인은 아직도 꽃다운 미인이었다.
따라서 유방이 여 황후보다도 척씨 부인을 더 많이 사랑했을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여 황후에게는 ‘영(盈)’이란 아들이 있고, 척씨 부인에게는 ‘여의(如意)’라는 아들이 있다.
조정에서 정실부인의 태생인 맏아들 영을 태자(太子)로 책봉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 註) 태자 영에게 이복 형이 있었고, 이복 동생도 여럿 있었다고 함.
그러나 척씨 부인의 태생인 여의는 머리도 총명하거니와 무예도 남달리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유방은 맏아들인 영보다도 둘째 아들인 여의를 더욱 사랑하였다.
게다가 척씨 부인이 밤마다 이부자리 속에서 간청을 해대는 바람에 유방은 마침내 태자를 갈아치울 결심을 하고, 어느 날 그 문제로 중신회의를 열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태자 영보다는 공자 여의가 훨씬 더 총명하고 유능한 것 같구려.
그러므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태자를 여의로 바꾸었으면 싶은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러자 중신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이구동성으로 간했다.
“폐하! 영 태자는 정실 황후의 태생이옵니다. 여의 공자는 부실 황후의 태생인 까닭에 태자로 책봉될 자격이 없는 분인 줄로 아뢰옵니다.
국가의 대위(大位)는 반드시 정실 원자(正室元子)라야만 계승할 자격이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자 유방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한다.
“정실 태생이거나 부실 태생이거나 모두가 나의 아들임에는 틀림이 없지 않소? 태자란 먼 장래에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이므로 반드시 우수한 인물이라야 할 것이오.
내가 여의를 태자로 책봉하려는 뜻은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오.”
유방은 간밤에 척씨 부인의 간청도 있고 해서 자신의 뜻을 좀처럼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궁중의 모든 행사는 법도(法度)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법이다.
‘태자는 반드시 정실 황후의 몸에서 태어난 원자(元子)로서 책봉해야 한다.’는 것은 법도에 뚜렷이 명기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그 법도에 따라 큰아들 영을 이미 태자로 결정한 것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방은 이미 책봉한 태자를 폐위시키고, 부실 소생인 여의를 태자로 책봉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유방이 이렇게 나오니 중신들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중신들은 제각기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간한다.
“폐하! 궁중의 법도는 대강(大綱)이므로 비록 폐하일지라도 범할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법도를 함부로 범하면 국가의 기강을 무엇으로 유지할 수 있으오리까?”
“과연 그러하옵니다. 이미 책봉해 놓으신 태자를 폐위하고, 자격도 없는 분을 태자로 바꾸시는 것은 국가의 기틀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것이오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이렇게 중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유방의 제의를 부당하다고 간하는 것이었으나 유방은 여의를 태자로 세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다시 반론하였다.
“도대체 법도란 왜 필요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법도란 것이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렇다면 법도에 다소 어긋나는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유능한 인물을 태자로 내세워서 나라를 이끌게 하여야 할 일이 아니겠소?
영 태자를 폐위하고, 여의를 태자로 책봉하려는 나의 의도는 바로 이 점에 있다는 것을 양해하여 주기 바라오.”
유방의 고집은 완강하기 이를 데 없자, 백발이 성성한 상대부(上大夫) 주창(周昌)이 벌떡 일어나더니 노기에 찬 어조로 외치듯 말한다.
“태자를 바꾼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이미 정해 놓으신 태자를 아무 죄도 없이 어떻게 바꾸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만약 폐하께서 태자를 기어코 여의 공자로 바꾸시겠다면, 저희들 중신들은 모두 벼슬을 사퇴하고 물러갈 것이오니 폐하께서는 통촉해 주시옵소서.”
조정의 원로 중신인 주창이 이렇게 완강하게 간청했다.
중신들이 모두 강력하게 나오자, 유방은 부득이 태자 교체를 보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척씨 부인은 울면서 유방에게 매달렸다.
“폐하가 여의 공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면, 어찌하여 태자로 책봉하지 못하시는 것이옵니까?
폐하가 여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모두가 거짓 말씀이었음을 소첩은 이제야 깨달았사옵니다.”
하며 눈물을 쏟는 것이 아닌가?
자고로 여자의 눈물 앞에서는 천하의 영웅 유방도 기(氣)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유방은 입장이 난처하여 척씨 부인을 이렇게 달랬다.
“오늘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조만간에 여의를 반드시 태자로 책봉해 줄 것이니 나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오.”
이렇게 두 마누라 틈바구니에 끼여 시달리는 점에 있어서는 제왕이라고 해서 보통 남자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복은 한꺼번에 몰려오지 않지만(福不竝行, 복불병행), 화는 한꺼번에 몰려온다(禍不單行, 화불단행)고 하지 않는가!
유방이 태자 교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판인데, 이번에는 묵특이 아닌 또 다른 오랑캐들이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다.
예전의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의 땅이었던 구령(舊領)을 마구 침범해 와서 백성들을 못살게 군다는 기별이 전해 들어왔는데, 특히 대주(代州)에서 달려온 비마는
“오랑캐 무리들을 속히 제압하지 못하면 대주는 머지않아 그들에게 빼앗기고 말게 될 것이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친 셈이었다.
유방이 진평을 불러 대책을 강구하니 진평이 아뢴다.
“영포 장군과 팽월 장군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불러올 수가 없는 일이옵고, 한신 장군은 군직(軍職)에서 해임되었으니 그를 보낼 수도 없는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지금 상국(相國)으로 있는 진희(陳稀) 장군을 보내 토벌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오직 진희 장군만이 그들을 토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유방은 진평의 제안에 따라 진희를 불러 명한다.
“경에게 정예군 10만을 줄 테니 대주로 달려가 오랑캐의 무리를 깨끗이 소탕해 주시오. 이번에 공로를 세우면 경을 대왕(代王)으로 책봉하리다.”
“많은 장수들 중에서 특별히 제게 대임(大任)을 맡겨 주시어 영광스럽기 그지없사옵니다. 신으로서는 국가와 황제 폐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그러나 오랑캐 군사들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10만 군사만 가지고서 그들을 깨끗이 소탕하기는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다면 경을 원수(元帥)로 임명해 줄 것이니 군사가 부족하거든 현지(現地)에서 군사를 새로 징발해 쓰도록 하시오.”
진희는 원수로 임명되어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대주로 출발하였다.
진희는 본시 한신의 그늘에서 자란 인물이다.
그러기에 그는 한신에게 좋은 계략이라도 듣고 싶어서 대주로 가는 길에 한신을 찾아가 문안을 드리고 나서
“저는 지금 황명을 받고 대주로 오랑캐를 소탕하러 가는 길이옵니다. 원수님께서는 좋은 계략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고 부탁을 하자, 한신은 우울한 시절을 보내고 있던 중인지라 진희에게 술을 권하며 물었다.
“장군은 지금 대주로 쳐들어온 오랑캐를 소탕하러 가는 길이라고요?”
“예, 그러하옵니다. 하오니 원수님께서 좋은 계략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한신은 고개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잠시 망설이더니
‘허~ 이 친구도 까딱 잘못 하다가는 나처럼 비참한 신세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군!’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진희는 한신의 독백(獨白)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제가 비참한 신세가 될지 모르시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한신은 그제야 자기 정신이 돌아온 듯 정색을 하며 진희에게 말한다.
“장군은 지금 오랑캐를 소탕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는데, 장군이 만약 공을 세우고 나면 오랑캐를 소탕한 일과 내가 연, 조, 제, 초나라를 정벌한 공로에 비해 어느 편의 공이 크다고 생각하시오?”
너무도 뜻밖의 질문에 진희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원수님께서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옵니까? 제가 북방 오랑캐들을 소탕했다 하기로 그 정도의 공로로서 어찌 연, 조, 제, 초나라를 정벌하신 원수님의 공로와 비교할 수 있으오리까?”
라고 말하자, 한신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한다.
“내가 장군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이오. 장군이 만약 오랑캐를 소탕하는데 성공하고 돌아오면 일시적으로 왕작(王爵)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장군도 언젠가는 나처럼 한제에게 버림을 받아 비참한 신세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오.
왜냐하면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보신탕 신세를 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오.”
진희는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직접 당사자인 한신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의 조언을 결코 무시해 넘길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희는 머리를 수그리며 한신에게 묻는다.
“원수님!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하여야 그와 같은 화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신은 오랫동안 묵상에 잠겨 있다가 대답한다.
“장군은 지금 10만 군사를 가지고 있지 않소? 장군에게 한제가 원수의 직함을 주어 오랑캐를 소탕하게 한 것을 보면, 한제가 장군을 무척 신임하고 있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소.
그러나 장군이 나처럼 비참한 신세를 면하려거든 오랑캐를 소탕하고 나서 그곳에 그냥 머물러 있으면서 한제에게 반기를 드는 길밖에 없을 것이오.
그러면 한제는 장군을 토벌하려고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데, 그때는 장군과 내가 공동으로 작전을 펴서 한제를 없애고, 우리가 천하를 장악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어느 때 그 일을 시행해야 좋을지 그 시기가 매우 중요하오. 시기를 잘 택하면 성공할 것이로되, 시기를 잘못 택하면 역적의 누명을 피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너무도 놀라운 한신의 제의였다.
그러나 진희 자신도 한신처럼 ‘비참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한신과 공모하여 배반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한신의 말대로 천하를 얻게 된다면 자신도 일약 천하의 영웅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진희는 한신과 함께 밤을 새워가면서 오랑캐를 소탕하는 일을 비롯하여 이후의 계획까지 치밀하게 상의한 뒤 우선 군사를 이끌고 대주로 떠나갔다.
진희는 대주에 도착하자 많은 첩자들을 일선으로 보내 오랑캐 군사들의 실태부터 염탐해 보았다.
며칠이 지난 뒤 첩자들이 돌아와 진희에게 고한다.
“적은 네 부대로 나뉘어 있는데, 한 부대의 병력이 각각 5만여 명씩입니다. 그리고 만왕이라는 자는 대주성 근처에 진지를 별도로 구축하고 있는데, 그의 부하도 3만 명가량 됩니다.”
“그러면 병력의 수가 20만이 넘는다는 말이냐?”
“아니옵니다. 그들의 후방에도 예비 병력이 4, 50만 명가량 가지고 있어서 결코 만만하게 여길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음...”
진희는 매우 걱정스러운 빛을 보이더니
“그러면 그들의 총대장은 누구더냐?”
하고 물었다.
“총대장은 합연적(哈延赤)이라는 자이옵니다. 그자는 큰 도끼를 잘 쓰기로 소문난 만부부당(萬夫不當)의 맹장이라고 합니다.
만약 원수께서 그놈 하나만 때려잡으시면 승기를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희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이덕, 진산, 초초 등의 세 대장들과 함께 작전회의를 열었다.
“적의 세력이 워낙 막강하여 무력으로 쳐부수기에는 매우 어려울 것 같구려. 그리하여 우리는 계략을 써서 승리하기로 합시다.
세 분은 이제부터 내가 일러주는 계략을 잘 들어 두었다가 그대로 실행에 옮기도록 하시오.”
그리고 세 대장들에게 각각 별도의 군령을 내려 일선에 배치시켜 놓았다.
- 제 17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