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68화

2021. 8. 19. 08:42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68화

☞ 유경(劉敬)의 진짜 미인계

유방은 장량을 기쁘게 맞으며 말한다.

“선생을 만나지 못한지 너무도 오래 되었습니다. 요즘은 건강이 어떠십니까?”
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성려(聖慮)를 베풀어 주시는 덕택에 무양(無恙)하게 지내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국무(國務)에 얼마나 분망하시옵니까?”
유방은 이때다 싶어서 새삼스럽게 정색을 하며 말한다.

“그러잖아도 나라에 번거로운 일이 생겨서 오늘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일부러 모셨습니다.”
“번거로운 일이란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선생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지난번 묵특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진평 대부가 미인계(美人計)로 교묘하게 쫓아 버렸는데, 묵특이 속임수에 넘어간 것을 크게 분개하여 또다시 대군을 몰고 침범해 온다니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이까?
선생께서 신묘한 계책을 말씀해 주소서.”
유방의 표정은 매우 심각하였다.
장량은 오랫동안 심사숙고하다가 머리를 정중하게 조아리며 대답한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은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 시국변화(時局變化)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지 못하여 전체적인 정국의 흐름에 둔감해졌사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진평 대부가 잘 알 수 있을 것이오니 그에게 하문(下問)해 주시옵소서. 진평 대부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모사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에 적잖이 섭섭한 빛을 보이며 말한다.

“물론 진평 대부와도 상의는 하겠소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도 선생의 말씀을 먼저 들어보고 싶어서 그러오.”
“과분하신 말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러나 신은 현직을 떠난 지가 오래되어 피아간(彼我間)의 정세에 너무도 어둡다 보니 어찌 좋은 계책을 꾸며 낼 수가 있으오리까?
옛글에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묵특의 문제는 애초부터 진평 대부가 취급해 왔으니 이번에도 진평 대부로 하여금 해결하게 하는 것이 상책인 줄로 아뢰옵니다.
북방 오랑캐의 문제에 대해서는 유경(劉敬) 대부도 매우 정통한 분이오니 그 두 사람과 상의하시면 반드시 좋은 계책이 나올 것이옵니다.”
유방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진평과 유경을 불러 상의하니 유경이 즉석에서 이렇게 아뢴다.

“우리는 천하를 평정하느라고 너무도 오랜 세월을 싸워왔기 때문에 이제 다시 묵특을 정벌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싸우기보다는 지략으로서 묵특을 너그럽게 포섭하는 방법이 적절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너그럽게 포섭하는 방법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수법을 말하는 것이오?”
그러자 유경은 매우 난처한 표정을 보이며 어렵게 말을 꺼낸다.

“폐하께서 진노(震怒)하실까 두려워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묵특을 포섭할 방법이 있기는 하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환해지며 물었다.

“모두가 나라를 위하는 일인데, 내 어찌 경의 말에 노여워하리오. 아무 걱정 말고 어서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유경은 그제야 안심하고 말한다.

“묵특은 본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위인입니다. 그가 진평 대부의 미인계 술책에 넘어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하니 이번에는 ‘거짓 미인계’가 아닌 ‘진짜 미인계’를 쓰면 묵특을 원만하게 포섭할 수가 있으리라 보옵니다.”
“진짜 미인계란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오.”
그러나 유경은 말하기가 몹시 거북한 듯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유방의 재촉하는 시선이 느껴지자 다음 순간 눈 딱 감고 이렇게 말하였다.

“폐하께서 사랑하는 미화 공주(美華公主)를 묵특에게 보내 주시면 만사는 쉽게 해결될 것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요? 내가 사랑하는 딸 미화 공주를 묵특에게 보내란 말이오?”
유방에게는 미화 공주라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눈에 넣어도 아픈 줄을 모를 정도로 사랑하는 열여섯 살의 절세미인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미화 공주를 다른 사람도 아닌 오랑캐 두목에게 보내주라고 하니 유방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유방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유경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다가

“경은 지금 자기 정신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오? 나는 천하를 통일한 만승천자(萬乘天子)요.
미화 공주는 만승천자인 내가 쥐면 꺼질 새라 불면 날아갈 새라 금지옥엽(金枝玉葉 )처럼 사랑하는 이 나라의 유일한 공주님이오.
그러한 미화 공주를 어떻게 북방의 오랑캐 두령에게 내주라고 말씀하시오!”
하고 정색을 하며 나무랐다.

“............”
유경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머리만 무겁게 수그리자, 이번에는 옆에서 듣고만 있던 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유경 대부의 제안은 매우 신묘한 술책인 줄로 사료되옵니다.
폐하께서 미화 공주를 묵특에게 보내 주시기가 무척 괴로우실 줄로 알고 있사오나 미화 공주를 어찌 국가의 흥망과 바꾸지 않을 수 있으오리까. 폐하께서는 각별히 통촉하시옵소서.”
유방은 그 말을 듣고 땅이 꺼질 듯 한 한숨을 쉬며 말한다.

“경도 유경 대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다는 말씀이오?”
진평이 결연히 대답한다.

“유경 대부께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북방 오랑캐들은 군사력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지금 형편으로는 그들과 싸워 보았자 우리가 쉽게 승리할 가망은 매우 희박하옵니다.
설사 싸워서 이긴다 하더라도 그때는 우리나라의 재정이 매우 피폐해질 것이옵니다.
그러나 유경 대부의 말씀대로 묵특을 사위로 삼으시면, 우리는 통일국가를 안전하게 보존해 가면서 북방 오랑캐의 광대한 봉토까지 우리의 영향력 아래에 넣게 될 것이니 그보다 더 좋은 술책이 어디 있으오리까?”
진평의 말에 유방은 크게 수긍되는 점이 있었으나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사랑하는 공주를 오랑캐에게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두 분 말씀대로 미화 공주를 오랑캐에게 내준다면 천하의 제후들이 나를 얼마나 비웃을 것이오? 미화 공주가 불쌍하게 여겨져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되겠소이다.”
하고 단호하게 거절해 버렸다.

그 바람에 방안에는 침통한 정적이 오랫동안 흘렀다.
그러다 유경이 돌연 고개를 번쩍 들며 큰소리로 외치듯 말한다.

“폐하! 미화 공주님을 묵특에게 보내지 않고도 위기를 타개할 방도가 방금 떠올랐사옵니다.”
유방은 유경의 말을 듣고 반색을 하며 반문한다.

“그래요? 미화 공주를 묵특에게 보내지 않고도 위기를 타개할 방도란 무엇이오?”
유경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묵특을 포섭하려면 미인을 보내주어야 하는 것만은 바꿀 수 없는 조건이옵니다.
그러나 미화 공주님만은 절대로 보내 주실 수 없으시다면, 민가(民家)에서 미화 공주님처럼 잘 생기고 얌전한 규수를 한 명 구해서 단기간에 황실 규범을 가르쳐 묵특에게 보낸다면 효과는 똑같을 것이옵니다.”
“과연 경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절묘한 방법이구려!”
그리고 진평 대부를 돌아다보며 묻는다.

“진평 대부는 유경 대부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유경 대부의 제안에 신도 감탄해 마지않고 있는 중이옵니다.”
그리하여 미화 공주 대신에 민가에서 아름다운 규수를 구하여 묵특에게 보내 주기로 결정하였다.

민가에서 미화 공주처럼 생긴 처녀를 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정에서는 미인 선택이 끝나자, 유방의 양녀(養女)로 삼아 황실 법도를 단기간에 가르쳤다.

그런 다음 유경으로 하여금 유방의 조서와 함께 양녀를 대동하고 묵특을 찾아가도록 하였다.
양녀와 함께 묵특에게 보내는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일 백등성 전투 때 그대를 속인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었소. 이에 짐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나의 공주를 그대에게 보내기로 하였으니그대는 공주와 백년가약을 맺음으로써 양국 간의 평화를 길이 도모해 주기 바라오.”

묵특은 유방의 조서를 받아 보고 크게 기뻐하며, 곧 문제의 ‘공주 아닌 공주’를 만나 보았다.
묵특은 본디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위인인데다 상대가 보통 여자가 아닌 ‘공주’라는 바람에 묵특은 입이 찢어지게 좋아하며 유경에게 말한다.

“대한 황제께서 공주를 보내주시면서 나를 사위로 삼으시겠다고 하셨으니 내 어찌 이런 영광을 사양하겠소이까?
이제 나는 황제 폐하의 사위가 됨으로써 우리 두 나라는 영원히 옹서지의(翁壻之誼)를 누리게 될 것이오.
대부께서는 돌아가시는 대로 나의 이 맹세를 황제 폐하께 분명하게 품고해 주시오.”
그리고 길일을 택하여 혼례식을 성대하게 올렸다.

유경은 중대한 사명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 그간의 경위를 황제에게 고하니 유방은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북방 오랑캐의 문제는 이로써 원만히 해결되었으니 오늘 밤부터는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게 되었소이다 그려.”

- 제 16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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