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 180회ㅡ
2021. 2. 9. 09:58ㆍ김삿갓 방랑기
★ 시인 김삿갓 방랑기 180화
[하늘과 땅은 만물의 객줏집 같다.]
김삿갓은 추월의 거문고 솜씨도 대단했지만 시를 그렇게까지 잘 지을 줄은 몰랐다.
“허어~ 강계 같은 벽촌에 자네와 같은 훌륭한 시인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네! 과연, 자네의 실력은 허난설헌(許蘭雪軒)이 무색할 지경이네 그려.”
“과찬의 말씀이시옵니다. 실은 외람되게도 제가 먼저 시를 읊은 것은 선생께서 손수 지으신 시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디 한 수 들려주시옵소서.”
시를 읊게 하려는 수법이 교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하하, 자네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솜씨가 기막히군 그래! 그럼, 자네가 나의 시름을 ‘제야’라는 시로 달래 주었으니 나는 그 운자(韻字)로 화답을 해야 되겠군 그래.”
그러자 추월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제가 어찌 선생께 화답 시를 바라겠사옵니까?”
“그러면 나더러 어떤 시를 지으라는 말인가?”
추월은 잠시 말이 없더니 문득 고개를 힘차게 들며 말했다.
“범우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선생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곳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한평생을 죽장망혜로 살아오셨다니 그동안의 인생에 대한 남다른 점이 많으시리라 생각되옵니다. 그런 점을 시로 읊어 주신다면 저에게는 많은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추월의 주문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하하하... 이제 보니 자네는 나에게 술을 몇 잔 먹여 놓고, 시를 빙자하여 나를 벌거숭이로 만들 작정을 한 모양이군.”
“저는 선생의 인생관에 대해 꼭 듣고 싶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의 주문대로 시를 짓자면, 인생관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의 우주관까지 송두리째 털어놓아도 부족할 것 같구먼!”
“저는 오래전부터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를 좀 더 깊이 알고 싶어 가르침을 받을 만한 선생님을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외람된 부탁이오나 삿갓 선생님께서는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시옵소서.”
김삿갓은 ‘스승’이라는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나더러 애인이 되어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환영하겠네. 그러나 나 같은 걸객이 자네의 스승이 될 수가 있단 말인가?”
김삿갓은 농담 삼아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고, 다시 말했다.
“그럼, 이왕 말이 났으니 자네의 소원대로 시를 한 수 지어 보기로 하겠네. ‘하늘과 땅은 만물의 객줏집 같다’는 뜻으로 ‘천지자만물지역여(天地者萬物之逆旅)’라는 제목으로 시를 한 번 지어 보기로 하겠네.”
말을 마친 김삿갓이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시상을 가다듬자, 추월은 부랴부랴 붓과 종이를 김삿갓 앞에 갖다 놓았다. 이윽고 눈을 뜬 김삿갓은 붓을 들기가 무섭게 먹을 찍어 거침없이 휘갈겼다.
造化主人蘧盧場(조화주인구로장)
隙駒過看皆如許(극구과간개여허)
兩開闢後仍朝暮(양개벽후잉조모)
一瞬息間渾來去(일순식간혼래거)
(蘧 : 풀이름 거, 여기서는 ‘구’로 읽고, 객줏집을 의미)
(해설)
천지는 조물주가 만든 객줏집과 같은 것!
말을 달리며 틈새로 엿보는 것 같도다.
낮과 밤이 두 개의 세계로 서로 엇갈려
눈 깜빡할 사이에 오고 가고 하노니.
추월은 꼼짝도 하지 않고 김삿갓의 일필휘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김삿갓의 시는 첫 구절부터가 실로 웅장하고 거창했기 때문이었다.
별로 깊이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건만 그의 붓끝에서는 마치 강물이 도도하게 흘러내리듯 웅장한 시가 연성 흘러나왔다.
回看宇宙億千劫(회간우주억천겁)
有道先生昨宿所(유도선생작숙소)
無涯天地物有涯(무애천지물유애)
百年其間吾逆旅(백년기간오역려)
蒙仙礨空短長篇(몽선뇌공단장편)
釋家康莊洪覆語(석가강장홍복어)
區區三萬六千日(구구삼만육천일)
盃酒靑蓮如夢處(배주청련여몽처)
[註]
▸몽선(蒙仙) : 원나라 때 수심결(修心訣)의 저자인 몽산화상(蒙山和尙)을 말함.
▸釋家 : 佛家를 말함.
▸康莊 : 혼잡한 거리, 번화한 길거리. 다섯 갈래의 오거리를 康, 육거리를 莊이라 함. ‘이아(爾雅) 석궁(釋宮)’
▸三萬六千日 : 100년을 뜻함. 36,000일=360일×100년
東園桃李片時春(동원도리편시춘)
一泡乾坤長感舒(일포건곤장감서)
光陰倏去倏來局(광음숙거숙래국)
混沌方主方死序(혼돈방주방사서)
(倏 : 빠를 숙)
人惟處一物號萬(인유처일물호만)
以變看之無臣細(이변간지무신세)
山川草木成變場(산천초목성변장)
帝伯侯王飜覆緖(제백후왕번복서)
(해설)
돌아보면 우주는 억 천만 년 내려오는 것!
뜻 있는 선비들이 간밤에 자고 간 곳이네.
만물은 끝이 있어도 천지는 끝이 없나니,
백 년쯤 살고 가는 나의 객줏집이다.
몽선은 부질없는 말을 많이 늘어놓았고,
석가도 번잡한 거리에서 많이 떠들었지만,
구구하게 살아온 그들의 백 년 세월도
연꽃잎에 고인 한 잔 술처럼 허망하도다.
봄 동산에 잠시 피는 복사꽃 자두꽃은
하늘땅이 내뿜는 숨결과 같은 것!
광음이 화살처럼 오가는 이 마당에서
죽고 사는 일이 어지럽기만 하구나.
인간은 한 번 살고 가더라도 만상은 복잡하여
변화의 면에서 보면 크고 작음이 없나니,
산천과 초목은 끊임없이 바뀌어 가고,
제왕과 호걸조차 흥왕이 항상 번복되도다.
김삿갓은 이렇게 칠언율시 다섯 수를 연이어 써 갈기고 나서 붓을 던지고 추월을 바라보았다.
“이 시는 나의 우주관을 솔직하게 고백한 시일세. 이 시에 대한 자네의 소감은 어떤가?”
- 18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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