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21화

2020. 8. 31. 09:34김삿갓 방랑기


#방랑시인 김삿갓-021화

[산은 마치 하늘을 열어 보는 듯 우뚝 솟아 있네.]

통천에서 안변까지는 이백오십 리라 했다.
하루해가 또 저물었다. 어둠발이 내리기 시작할 때가 나그네에게는 제일 외로운 시간이다.

김삿갓은 아무 집이나 들어설 양으로 조그만 마을로 들어갔다.
첫눈에 가난한 마을이라 생각되었다.
세상은 참 고르지 않다. 솟을대문에 하인까지 두고 거드름 피우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 찌그러져 가는 집에서 겨우 연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헌데 김삿갓이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으로는 잘 사는 사람보다 못사는 사람이 더 많고, 인심을 쓰는 데는 잘 사는 사람보다 못사는 사람들이 더 좋았다.
김삿갓은 오막살이 집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방안에서는 따듯한 감촉이 느껴지는 호롱불 빛이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주인장 계십니까?”
“뉘시오?”
방안에서는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뒤이어 방문이 열리면서 오십 세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목을 빼고 쳐다본다.

“나그네가 어둠을 만나 미안하게도 하룻밤 신세를 지었으면 합니다.”
“허허, 우리 집에도 손님이 오실 때가 있구려. 어서 들어오시오.”
주인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김삿갓은 일례를 보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시는 손님이시오?”
사람 좋게 생긴 주인이 삿갓을 보고 물었다.

“동가 식 서가 숙하는 중에 안변까지 가는 중입니다.”
“먼 길을 가시는구려. 참 저녁은 아직 자시지 않았을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주인은 방 한쪽 구석에서 실타래를 감고 있던 마누라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누라는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갔다.

“두 양주분만 계시오?”
“아들 하나 하고 며느리가 있지요. 이곳은 어촌도 아니고 농사지을 땅도 별로 없는 곳이라 살기가 참 곤란한 곳이지요.”
“아 네, 그렇군요.”
삿갓은 주인장의 이곳 형편을 듣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보았던 빈촌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김삿갓과 마주 보고 있는 주인장도 말이 없고 삿갓도 이렇다 할 말이 없어 두 사람은 묵묵히 등잔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서 부스럭 부스럭 나뭇단을 풀어 헤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 밥상이 들어왔다.
간단한 저녁상이었다. 조밥이 한 그릇, 된장찌개에 김치 한 보시기가 전부였다.
김삿갓은 몇 번씩이나 치하를 한 후 수저를 들었다.

언젠가처럼 이 집에서도 주인 내외와 같이 한방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불을 끄고 누웠으나 잠은 금방 오지 않았다.
아랫목 쪽에서는 주인 내외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손님이 자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여보, 손님이 오셨는데 저녁은 그렇게 대접했다손 치고, 아침은 어떡하지요?”
부인의 말이었다.

“글쎄, 우리 같은 집에 손님이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아침에 조밥을 드릴 수야 있나... 박초시네 집에 뭐라도 맡기고 쌀되라도 얻어 올 수는 없을까?”
“뭐가 있어야지요. 두루마기 하나 변변한 것 없는데, 그나마 며느리가 입고 가고 없으니 어떡한대요.”
“음, 정선달네 집에 날이 새거든 가봐요. 손님이 왔다고 사정하고 쌀 한 되만 꿔봐요.”
이들의 이야기를 어두운 방에서 듣고 있던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애처로울 정도로 그들의 인정이 따스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이른 새벽, 김삿갓은 소피를 보러 가는 척하고 주인 내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밖으로 나왔다.
어젯밤 그들의 이야기를 못 들었다면 모를 일이되, 알고 있으면서 밥을 얻어먹을 수는 없었다.

초겨울 차가운 새벽바람을 쏘이며 정처 없는 발걸음을 옮겨놓는 김삿갓! 저절로 시구가 읊조려졌다.

盤中無肉 權歸菜(반중무육 권귀채) 밥상에는 고기 대신 채소가 뽐을 내고,
廚中乏薪 禍及籬(주중핍신 화급리) 부엌에는 땔감이 없으매 화가 울타리에 미친다.
婦姑食時 同器食(부고식시 동기식)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그릇 밥을 먹고,
出所父子 易衣行(출소부자 역의행) 출타 할 때는 부자가 서로 옷을 바꿔 입는다.

아침도 굶은 채 그는 한나절을 꼬박 걸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길가에는 인적이 없었고, 멀리 산 아래로 집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족히 이십여 리는 걸어가야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걸으며 날짜를 꼽아보니 시월 하고도 그믐이었다.

“허, 내일부터 동짓달이로구나.”
날짜를 꼽아본들 무엇하랴 싶지만 한편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였다.

동짓달, 이제 평지에도 눈발이 날릴 것이다.
또한 살을 애이는 바람도 몰아칠 것이다.
김삿갓은 공허한 마음으로 산천을 휘돌아 보았다. 산도 들도 텅텅 비어 있었다.
언제 내렸는지 먼 산봉우리에는 하얗게 눈이 내려 있었다.

다정다감한 시인의 가슴에는 시심이 가을 하늘처럼 파랗게 물들었다.

葉落瘠容 雪滿頭(엽락척용 설만두) 잎은 져서 앙상하고, 눈은 봉우리에 가득한데,
勢如天撑 屹然浮(세여천탱 흘연부) 산은 마치 하늘을 열어 보는 듯 우뚝 솟아 있네.

餘嶺羅立 兒孩似(여령나립 아해사) 그 아래 봉우리는 아이인 양 늘어서 있고,
或者中間 仙鶴遊(혹자중간 선학유) 그 가운데 어떤 봉우리에선 학이 놀고 있구나.

〈제022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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