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20화
2020. 8. 30. 10:19ㆍ김삿갓 방랑기
#방랑시인 김삿갓-020화
[眼中七子 皆爲盜(안중칠자 곤위도 : 눈앞에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다)]
김삿갓은 외금강에 이르러 바다와 접한 금강산의 또 다른 풍치를 마음껏 감상했다.
이제 계절은 중추(仲秋)로 접어들어 산중의 바람은 얇은 베옷을 헤집고 들어와 오한을 느끼게 한다.
그는 마침내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망망한 바다를 보니 막혔던 속이 확 트이는 것 같으면서도 시름은 파도를 타고 더욱 간절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외금강에서 함경도 땅으로 가는 길은 바다와 육지가 숨바꼭질을 하는 길이었다.
바다를 끼고 나란히 길을 걷다가도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다는 갑자기 먼 곳에 있었다.
이렇게 해금강이라 일컬어지는 외금강을 지나 북으로 발길을 계속하자 강원도 땅이 다하고 함경도 경내로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으로 들어선 큰 읍내는 통천(通川)이었다.
통천은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삼백 여 호의 큰 읍이었다. 읍내 저잣거리를 지나 어느 솟을대문이 거만하게 솟아 있는 집 앞에 당도하였다.
무슨 잔치가 있는지 사람들이 분주하게 대문을 들락거리고, 울안에서는 기름 냄새와 더불어 음식 냄새가 풍겨 나오는데 배가 고픈 김삿갓의 회를 요동시켰다.
김삿갓은 마침 다가오는 사람이 있어 냉큼 물었다.
“이 집에 무슨 경사가 났소이까?”
“네, 윤진사 아버지의 회갑잔치라오.”
김삿갓은 옳거니 했다.
‘밥과 술을 넉넉히 얻어먹겠구나.’
그는 다짜고짜 솟을대문으로 들어섰다.
“당신 누구요?”
하인인 듯한 사내가 문간 안에 서 있다가 사납게 소리친다.
“아따~ 그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드네. 누구긴 누구야. 윤진사 춘부장님 수연에 참석하러 왔지.”
김삿갓이 눈을 부라리며 응수하자 사내는 주춤했다.
그러곤 살펴본 꼬락서니로 보아 윤진사 쪽을 잘 아는 망조들은 양반 껍데기쯤으로 생각되었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넓은 대청에는 잔칫상이 호화스럽게 차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로 회갑을 맞은 늙은이가 의관을 갖추고 점잔을 빼면서 앉았고, 맞은편에는 이 지방에서 행세깨나 하는 상객들이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대문간 곁에는 아무렇게나 둘러앉은 걸인에 가까운 부류들이 있었다.
좌중을 둘러본 김삿갓은 기왕에 얻어먹을 것, 상객들이 앉은 대청 위로 성큼 올라섰다.
“아니, 어디라고 올라서는 게요!”
김삿갓의 행색을 마뜩하지 않게 쳐다보던 하인 한 놈이 김삿갓 뒤통수에 대고 큰소리를 질렀다.
일순, 좌중의 모두는 김삿갓과 하인을 향했다.
“아니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윤진사가 큰 소리가 나자 점잖게 참견했다.
“글쎄 걸인 주제에 대청으로 오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소인이 끌어내리는 중입니다요.”
“오늘 같은 날 너무 큰 소리 내지 말고 술잔이나 먹여 보내도록 하여라.”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비록 걸인 행색을 하였지만 막상 걸인 취급을 받고 보니 기막히기도 하고 울화도 치밀었다. 그는 점잔을 빼는 윤진사가 얄미워 그쪽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人到人家 不待人 主人人事 難爲人(인도인가 부대인 주인인사 난위인)”
즉 ‘사람이 집에 찾아왔는데도 사람대접을 안 하니 주인의 인사는 사람답지 못 하구나’하는 말이었다.
통천 지방에서는 글줄이나 읽은 윤진사인지라 삿갓의 이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음?”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김삿갓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이미 홱 돌아서서 대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봐라, 저분을 모셔오너라.”
“저 걸인을요?”
하인 놈은 영문을 몰라 주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놈아, 내가 보기에는 보통 걸인이 아닌 것 같다. 냉큼 가서 불러 오너라.”
하인 놈은 궁시렁거리면서 김삿갓의 뒤를 따라 문간으로 뛰어갔다.
“윤진사, 무슨 일이오?”
술을 마시느라 삿갓의 말을 못들은 손님이 물었다.
“초라한 과객인데 잘하면 좋은 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소이다.”
“초라하다니 행색은 어떻습디까?”
“허름한 무명 두루마기에 삿갓을 썼습니다.”
“그래요?”
“아니 그런 과객을 알고 계시오?”
“듣자하니 삿갓을 쓰고 다니는 젊은 과객이 금강산 일대에서 크게 이름을 날리고 있다더군요.
금강산이라면 숨어서 공부하는 인재나 고승이 많을 것인데, 그들보다 윗질이라 하더이다.”
풍문으로 김삿갓의 행장을 들은 모양인데, 윤진사에겐 초문이었다.
“금강산이 여기서 어디라고 그 글 잘하는 과객이 왔겠소, 삿갓이야 누구든 쓰면 될 것이고.”
한편 김삿갓은 큰길을 향해 걷고 있었다.
배를 주릴지언정 말석에 끼어 앉아 콩나물 대가리를 씹고 싶지는 않았다.
“이보시오!”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알아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낯선 곳에서 설마 자기를 부르랴 싶어 삿갓은 그냥 걸었다.
“여보시오. 삿갓 쓴 양반.”
그제야 김삿갓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까 그 하인 놈이었다. 김삿갓은 울컥 분통을 터트렸다.
“뭣 때문에 나를 불러 세운단 말이오?”
김삿갓은 조금 전 분풀이를 하듯 눈을 부라리며 뒤따라온 하인 놈을 위아래로 훑으며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나으리께서 댁을 모셔오랍니다.”
“나를?”
“어떤 일인 줄 나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가십시다.”
김삿갓은 아까 자기가 내뱉은 말을 윤진사가 들었으려니 생각했다.
그리고 하인을 따라 다시 윤진사 집으로 들어갔다.
“어서 올라오시오. 아까는 대접이 소홀했던 것 같소. 너무 괘념치 마시고 술이나 한잔 드시오.”
김삿갓은 대청으로 올라 말석에 자리를 잡았다.
“보아하니 글깨나 아시는 선비신 듯 한데 이런 자리에서는 의례 시 한 수쯤은 오갈 법하지 않겠소? 음식을 드시면서 천천히 글 놀이나 해봅시다.”
윤진사는 호기심이 동해 이렇게 서두를 꺼내 놓았다.
음식상이 새로 차려져 나왔다.
김삿갓은 우선 먹고 볼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양하지 않고 이것저것 배불리 먹고 마셨다.
“얘야, 지필묵을 가져 오너라.”
윤진사가 아들에게 명하자 장성한 아들 하나가 냉큼 가지고 왔다.
“저 선비께 드려라.”
삿갓 앞에 지필묵이 놓여졌다.
“그럼, 내 노부님을 위하여 수연시(壽宴詩) 한 수만 지어 주십시오.”
사실 윤진사는 뭣인가 속에 들은 체하고 있는 삿갓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따라서 수연시를 청해 삿갓의 실력을 알고 싶었다.
“음식을 대접 받았으니 그 값을 해야지요. 그냥 돌아가면 진짜 걸인이 되지 않겠소이까?”
삿갓은 필을 들었다.
그리고 생각도 할 필요 없다는 듯, 첫 귀절을 달필로 써 놓았다.
〈彼坐老人 不似人(피좌노인 불사인) 저기 앉은 노인은 사람 같지 않구나.〉
“뭐라고?”
윤진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기 부친을 가리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람 같지 않다고 썼으니 이런 모욕이 또 어디 있으랴.
손님들도 글씨를 넘겨보더니 쑥덕 쑥덕거렸다.
삿갓은 일부러 보란 듯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음 귀절을 썼다.
〈疑是天上 降神仙(의시천상 강신선)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선만 같구나.〉
이 글을 보자 붉으락푸르락 하던 윤진사 얼굴이 바보처럼 해맑아졌다.
“하하하하... 이것 참 기막히군! 나는 첫 귀절을 읽고 깜짝 놀랐구먼. 내가 나이를 들었어도 아직도 성질이 괄괄해서 큰일이란 말씀이야.”
좌중의 분위기도 한결 부드럽게 풀어졌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음 구절을 써 내려갔다.
〈眼中七子 皆爲盜(안중칠자 개위도) 눈앞에 있는 아들 일곱은 모두 도둑놈이다.〉
좌중은 다시 한 번 난리가 났다.
“당신 누구보고 도둑놈이라고 하는 거요?”
“음식을 좋게 얻어먹었으면 고이 삭힐 일이지 재는 왜 뿌리는 거야?”
윤진사 아들들이 벌떼같이 일어섰다.
“가만있어라. 글이란 완성을 한 후 평하는 법이다.”
윤진사는 소매 자락까지 휘저으며 성난 아들들을 만류했다.
“참 사람들, 성질도 급하구려.”
김삿갓은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결구를 써놓았다.
〈偸得天桃 獻壽宴(투득천도 헌수연) 몰래 천도를 훔쳐서 수연상에 바쳤구나.〉
즉, 효성을 나타낸 글이었다.
“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소이다. 정말 본인으로선 따를 수 없는 명시올시다! 내가 틀림없이, 사람을 보기는 잘 보았지.”
윤진사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으며 좋아했고, 성을 내던 그의 아들들도 싱글벙글했고, 좌중에 손님들도 삿갓의 재주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어쩌면 글귀 한 구절로 사람들을 모두 울고 웃게 한단 말인가? 기가 막히군 기가 막혀!”
“여봐라, 오늘 뜻밖에도 뛰어난 시객을 만나 좋은 수연시를 얻었으니 그 답례를 해야겠구나. 들어가서 나 주려고 만든 의복 일습을 내 오거라.”
“아버님, 갑자기 새 옷은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아들 하나가 물었다.
“앞으로 날이 꽤 추워질 터인데, 저 선비님 옷은 아직도 여름옷이 아니냐? 솜 둔 것으로 내 오거라.”
김삿갓은 수연시 덕분에 음식을 마음껏 대접받았음은 물론 솜 둔 두루마기며 핫바지, 저고리까지 선물 받게 되었다.
미구에 눈이 내릴 터인데,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하룻밤을 편히 지낸 후 다음날 다시 길을 떠났다.
〈제021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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