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9화
2020. 8. 29. 10:13ㆍ김삿갓 방랑기
#방랑시인 김삿갓-019화
[구름 따라 발길 따라]
입석봉을 떠난 김삿갓은 한동안 시냇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떠나오긴 했으나 막상 갈 곳을 정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짜증이 날 법도 했지만 그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언제 다시 올 줄 모르는 금강산이니 내금강 구경을 마치고 외금강으로 나가 바다 경치나 구경하자, 그길로 북상하면 함경도 땅이 나오겠지.”
내금강 곳곳을 돌아다니고 나니 어느새 구월 초순이 되었다.
산속에 가을은 빨리 와서 벌써 나뭇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도 눈에 띄었다.
김삿갓은 먹고 자는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골마다 암자요, 절이 있었다.
간간이 풍류를 즐기는 시객도 있어 그는 술에 목마르지 않았고, 밥 한 술에 배고프지 않았다.
내금강 구경을 마치고 외금강으로 넘어가는 길로 들어섰다. 비로봉을 중심으로 해금강까지는 백여 리가 된다고 했지만 가늠할 수는 없었다. 그저 마냥 걷고 목마르면 냇가 물을 마시고, 날이 저물면 암자나 절을 찾으면 그뿐이었다.
어느 감나무가 울창한 산골마을에 이르렀다. 산중에서 오랜만에 보는 동네였다.
집집마다 감나무에 빨간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김삿갓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마을로 들어섰다.
산골마을이라 돌담이 아니면 싸리나무 울타리였다.
밤은 벌써 다 털려 빈 가지만 남았는데, 집집마다 감나무는 감을 잔뜩 매달고 휘늘어져 있었다.
김삿갓은 무심코 어느 돌담길을 휘돌다가 우연히 돌담 너머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곳에는 국화꽃이 만발해 있었다. 순간 김삿갓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국화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국화꽃 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는 처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처녀는 열여덟, 아홉이나 되었을까, 삼단 같은 머리가 탐스러운 엉덩이 위까지 치렁치렁 내려뜨려져 있는데, 겨드랑이 부근의 살이 터질 듯이 불거져 나와 있었다.
김삿갓은 부지중에 침을 꿀꺽 삼켰다.
처녀가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음이 자못 안타까웠다.
그는 돌을 던져서라도 처녀의 주의를 이쪽으로 끌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뿐으로 얼굴을 더욱 담 곁으로 바싹 붙이고 열심히 처녀의 자태를 감상하였다.
집을 떠나온 지 어언 반 년, 한창 혈기가 들끓는 청춘은 그녀 쪽으로 그를 이끌고 있었다.
김삿갓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춘정(春情)이 샘솟았다.
숨결이 더워지고 심장조차 쿵쿵 뛰었다.
그는 어느새 애타는 자기의 가슴을 시로 읊조리고 있었다.
山中處女 大如孃(산중처녀 대여양) 시집갈 때 다된 듯 무르익은 산중처녀,
緩着粉紅 短布裳(완착분홍 단포상) 분홍빛 짧은 치마를 느슨하게 입었구나.
赤脚蹌踉 羞過客(적각창랑 수과객) 살색 좋은 통통한 다리로 허둥대며 과객을 부끄러워하고,
松籬深院 弄花香(송리심원 농화향) 소나무 울 밑 으슥한 곳에서 꽃향기를 희롱하네.
김삿갓은 집을 떠나오기 전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내가 생각났다.
그리곤 쩝쩝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돌려 돌담을 외면했다.
‘지금쯤 아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막연한 걱정과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계속했다.
이렇게 몇 고개를 넘다 보니 멀리서나마 바다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벌써 날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우선 잠잘 곳이 급하게 되었다.
그는 인가를 찾았다. 지세를 보아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산중에 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한 고개를 다시 넘었다. 주위는 벌써 어둠에 묻히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김삿갓은 서너 호의 화전민 부락을 발견하였다.
우선 마음이 놓였다.
처마가 땅에 닿을 듯한 토담집들이었다.
그는 한 집을 찾았다.
“주인장 계십니까?”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허스름한 차림의 사나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누굴 찾으시는지요?”
“과객이 날이 저물어 염치없이 찾아왔습니다. 부엌도 좋으니 그저 산짐승의 해나 면하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손님 누추하지만 들어가십시다. 아무리 단칸방이라지만 이렇게 찾아오신 손님을 부엌으로 모실 수야 있겠습니까?”
역시 가난한 사람일수록 인정만은 따뜻했다.
김삿갓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의 공기는 매우 탁했다.
“손님 저녁 진지 드셔야지요. 저희도 아직 먹지 않았습니다. 이런 산골에서 감자나 심어 먹고 살기 때문에 대접이 변변치 못합니다.”
김삿갓은 미안하여 안절부절 못하였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이거 너무 염치가 없군요.”
그러면서 삿갓을 벗어 한쪽 구석에 놓았다.
이 집도 식구래야 두 내외뿐이었다. 부인이 저녁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조에다 감자를 섞은 밥이었다.
그동안 절간을 다니며 신세를 졌던 터에 하얀 쌀밥이나 보리가 반쯤 섞인 밥을 먹던 입맛이라 들여온 밥은 매우 껄끄러웠으나 주인 내외의 따스한 인정이 너무 훈훈하여 식욕이 절로 일었다.
저녁을 마친 후 김삿갓은 주인 내외와 금강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방이라 어쩔 수 없이 주인 내외와 동침을 하게 되었다.
때문에 잠자리가 몹시 불편하였다.
어설픈 잠자리였지만 설핏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단칸방임을 불구하고 간밤에 잠을 자게 되었으니 삿갓은 주인 아낙을 볼 염치가 없었다.
아침이나 얻어먹고 어서 떠나리라 다짐하고 있는데 상이 들어왔다.
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보리밥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손님 대접을 하느라고 갓 지은 밥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식사를 마친 후 그는 주인 내외에게 백배 치하를 한 후 길을 떠났다.
왠지 뭉클한 감개가 앞을 막아 그는 시를 한 수 읊었다.
曲木爲椽 詹着地(곡목위연 첨착지) 굽은 나무로 만든 서까래는 땅에 닿을 듯,
其間如斗 僅容身(기간여두 근용신) 방조차 콩알만하여 겨우 몸을 움직이겠네.
平生不欲 長腰屈(평생불욕 장요굴) 평생 긴 허리를 굽히지 않으려 했는데,
此夜難謨 一脚伸(차야난모 일각신) 간밤에는 다리조차 못 펴고 새우잠을 잤구나.
鼠穴煙通 渾然漆(서혈연통 혼연칠) 쥐구멍으로 연기가 통해 방안은 칠흑같이 어둡고,
封窓茅隔 亦無晨(봉창모격 역무신) 창에는 칡과 억새가 엉켜 아침도 모르더라.
雖然免得 衣冠濕(수연면득 의관습) 비록 이렇기는 했어도 옷 젖음을 면했으니,
臨別慇懃 謝主人(임별은근 사주인) 떠날 때는 은근히 주인에게 감사할밖에.
〈제020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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